"쌍둥이를 업고라도 조력회에 참석하겠습니다"

"쌍둥이를 업고라도 조력회에 참석하겠습니다"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21

한국기독공보
2023년 06월 08일(목) 01:20
조력회의 사역은 정확하고 흥미로웠다. 매달 프로그램이 준비됐고, 번역 및 복사돼 50개 교회로 전달됐다. 그것은 중국에서의 해외선교사역, 제주 사역, 바이블 공부 모임, 청지기와 십일조, 장로회 총회에 보낼 보고서 준비, 그리고 세계선교 사역에 관한 주제들이다.

조력회의 6월 주제는 오순절이다. 이러한 조력회 프로그램에 더해, 월간 프로그램이 다른 서클과 기도 그룹을 위한 주간 프로그램으로 준비됐다.

1월 초, 양림교회 내 열네 서클을 방문지도하고, 재정비했다. 가장 약한 세 서클을 선정해서 금년 내내 참석했다. 이는 내가 임원들과의 수많은 모임, 조력회와 노회 모임과 더불어 매주 세 번의 모임을 매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역은 주일 예배에 많은 여성이 참석하게 만들었다.

이 여성들 모임에서 긴밀한 접촉은 아주 뜻있는 경험이었고 결실을 가져왔다. 그들은 치아 때문에, 또는 아픈 아기들, 죽은 가족들, 작은 소녀들, 배고픔, 결혼 때문에 찾아왔는데, 이런 사건이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다가서는 통로로 이용됐다.

3월 10~11일엔 제8차 전남 조력총회의 모임이 부인성경공부 기간 중 열렸다. 모임의 모든 일정이 매우 능력 있는 한국인 여성 임원들에 의해 진행됐다. 물론 아주 세심한 계획이 모임 전에 이미 수립됐다. 31곳의 교회와 대표들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한 시골 교회 여성은, 그녀가 모임에 참석해 축복을 받았기에, 만일 주님이 다음해에 쌍둥이를 주신다 하더라도, 쌍둥이를 모두 등에 업고 모임에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전남노회에 보고된 내용에 따르면, 조력회 등록 회원이 979명, 그중 94명이 십일조를 드리고, 143명은 적극적인 주일 봉사자로, 219명이 노회에 참석하고, 노회와 조력회 월례 모임에 참석하는 평균 인원이 666명이다.

모인 연간 헌금액은 $1259.34로, $250은 총회, 중국 선교, 제주의 홈미션, 그리고 지역 섬들 사역에 쓰였다. 남은 $1009.34는 지역 교회에서 목사 사례금으로, 그리고 전도부인들과 구제와 다른 비용에 쓰였다.

1930년 6월 1일, 노라복 부인(Maie B. Knox)의 보고서 중.

#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힘차게 나아가는 부인조력회

1929년 10월은 세계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급속히 성장했던 미국 증권시장은 9월과 10월초 증권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10월 24일 증권시장 붕괴가 실질상 처음으로 나타났다. 검은 목요일이라고 알려진 이날 하루 거래량은 1289만 4650주에 달했다. 가격 폭락은 그 다음 주에도 이어져 검은 화요일에는 1600만 주가 거래돼 증권시장은 붕괴됐다.

1930년 12월 11일 뉴욕의 은행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이 파산해 50만 명이 예금을 찾을 수 없게 됐다. 1931년 한 해 동안 23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1930~1933년까지 매주 평균 6만 4000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1933년에는 16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가 생겼다.

특히 경기의 규정적 요인인 건축·철강·자동차의 감퇴는 뚜렷했고, 체화의 격증, 생산의 축소, 기업도산의 속출, 실업자의 증대 등 이러한 하강 요인의 누적적 상호파급으로 경제활동이 마비됐다.

금융 공황은 중부 유럽에서 오랫동안 역할을 감당해온 오스트리아 은행 크레디탄슈탈트 은행을 1931년 5월에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이 여파는 독일, 영국으로도 파급되다가, 1931년 9월엔 영국, 1933년 3월엔 미국이 금본위제도에서 이탈한다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본위 화폐붕괴에까지 이르렀다. 이 포괄적인 대공황은 1933년 여름에는 바닥을 드러내 보이면서 불황으로 옮겨가고야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경제 대공황으로 장로교단은 물론 선교현장은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됐다. 더욱이 세계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가 고도의 성장세로 나갈 때 교회는 단비를 만난 듯 은행에서 돈을 끌어다 교회를 새로 짓는 등 성장위주의 과감한 전도전략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놀라운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공황이 시작된 1929년 10월 이후 직격탄은 조선의 선교현장에도 떨어졌다.

1930년은 거의 모든 감리교, 장로교 교단이 긴축정책으로 들어갔고 남장로회는 1930년 선교부 예산부로 1/3로 줄어들고 선교사의 생활비 역시 감봉됐다. 그리고 5년 사역 후에 1년간 쉬어야 했던 안식년 휴가조차 긴급한 병가가 아니면 허락되지 않았다.

1929년 6월 이래 생애 단 한 차례 안식년 휴가를 나왔던 서서평 선교사가 1930년 8월 조선으로 되돌아가면서 후원교회에 보낸 편지엔 경제공황에 대한 영적 진단과 어려움에 처한 미국교회의 현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현실을 통해 지난 18년 동안 조선에서 사역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사 풍성히 채워주신 사실에 감사함으로 '지푸라기 없이 벽돌을 구어야 하는 미래에 대한 도전'을 말한다.

이일학교뿐 아니라 조력회의 모든 운영이 타격을 받았음에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순교적 헌신으로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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