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의 중요한 항구도시 '두러스'

로마시대의 중요한 항구도시 '두러스'

[ 구약학자가 본 바울의 길 ] 비아 에그나티아(7)

하경택 교수
2023년 05월 25일(목) 13:47
두러스 원형극장.
바울과 성 아스티 기념교회.
이번 답사여정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알바니아의 두러스(Durres)와 아폴로니아(Apolonia)다. 이 두 도시는 로마의 압비아 가도를 이어 비잔티움(이스탄불)까지 이르는 '비아 에그나티아'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 두 도시는 경쟁 도시였다고 한다. 아폴로니아는 고대 유적지로만 존재하지만, 두러스는 현재 알바니아의 제2의 도시로서 여전히 활발히 도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두러스는 뒤라키움(Dyrrachium)에서 파생된 알바니아식 명칭이다. 도시의 기원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증언되는 바에 따르면 주전 627까지 소급된다. 로마시대 두러스는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로마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또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주전 48년에는 이곳에서 줄리어스 시저와 폼페이가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두러스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은 로마시대의 원형극장(Amphitheater)이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 곳곳에 수많은 원형극장을 지었다. 현재는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에 걸쳐 230여 개가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두러스의 원형극장이다. 그런데 이 원형극장은 발칸반도에 남아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10대 원형극장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이것은 주후 2세기 트라얀 황제(주후 98~117년) 때 건설된 것으로 2만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은 1960년대 고고학 연구를 통해 발견된 이후 1980년대에 추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2004년 대규모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박물관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본래 모습의 3분의1 정도만 복원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상당하다. 5세기에는 원형극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묘지로 활용되었으며, 6세기에는 이곳에 두러스의 첫 번째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아스티(Saint Asti)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이 예배당은 다양한 성인들(St. Stephen, St. Mary, St. Sophia, St. Gabriel 등)의 모자이크로 유명하다. 이 모자이크는 지금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두러스에 전파되었던 기독교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처럼 생명을 건 검투사들의 싸움이 펼쳐졌던 경기장이 이젠 묘지가 되어 남아 있다. 고통스런 싸움, 영광스런 환희의 순간이 사라지고 이젠 고요한 정적만 흐른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죽음의 정적으로 증언된다.

이 원형극장에서 바닷가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바울(Saint Paul)과 성 아스티를 기념하는 교회를 만날 수 있다. 일루리곤 지역의 최초 전도자로 인정되는 바울과 주후 100년 트라얀 황제 때 최초로 순교한 성 아스티를 기념하는 교회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는 바울의 증언(롬 15:19)을 확인시켜준다.

우리가 두러스를 방문한 기간 내내 일기가 불순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이틀 동안 머물렀던 숙소가 두러스 해변에 있었는데, 숙소 발코니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 풍경은 거칠고 험했다. 성난 파도가 해변의 모래 위로 거침없이 몰려왔다. 거친 바람과 성난 파도는 갑자기 나를 주후 1세기 두러스 해변에 서게 했다. 에스겔 머리털 한 모습을 잡아 예루살렘에 옮겨다 놓은 야훼의 권능처럼 말이다(겔 8:3). 그때 나는 이런 불순한 날씨 속에 파도를 이기고 비바람을 견디면서 '비아 에그나티아'를 찾았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생각했다.

하경택 교수 / 장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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