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형제의 제자 클레멘트와 나움

키릴 형제의 제자 클레멘트와 나움

[ 구약학자가 본 바울의 길 ] 비아 에그나티아(6)

하경택 교수
2023년 05월 18일(목) 10:04
새롭게 지어진 클레멘트 수도원 건물.
나움 수도원 건물 안에 조성된 나움 무덤.


키릴 형제가 죽은 후 그들의 선교 사업은 제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두 제자가 오흐리드의 클레멘트와 나움이다. 클레멘트가 오흐리드 지역에 파견된 것은 886년이다. 당시 오흐리드는 불가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다. 865년 불가리아에 기독교가 채택된 후 종교 의식은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된 성직자들에 의해 그리스어로 거행되었다. 이때 증가하는 비잔틴 영향력과 국가의 약화를 두려워한 보리스(Boris) 대공(duke)은 불가리아의 정치적 독립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대 슬라브어 채택을 결심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보리스는 슬라브어로 신학을 가르칠 두 개의 문학 아카데미(literary academy) 설립을 준비했는데, 첫 번째 학교는 수도 플리스카(Pliska)에, 두 번째 학교는 쿠트미체비차(Kutmichevitsa) 지역의 오흐리드에 둔다. 나움이 플리스카에 머물면서 플리스카 문학 학교를 준비하는 동안, 클레멘트는 오흐리드에서 미래 성직자들에 대한 신학 교육을 맡도록 위임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지은 옛 교회 위에 새 교회를 짓고, 자신의 수호성인 이름을 따서 성 판텔레이몬(Saint Panteleimon) 교회라 명명한다. 그는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고대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를 가르쳤다. 이때 그가 가르친 제자가 약 3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곳은 '최초의 슬라브 대학'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916년 사망한 후 교회 안에 묻혔다.

한편, 893년 새로운 불가리아 통치자 시메온(Simeon) 대제는 드렘비카(Drembica)와 벨리카(Velika)의 주교로 성임된 클레멘트를 대신하여 나움(Naum)을 파견한다. 그는 오흐리드에 불려 와 클레멘트가 하던 교육 활동을 이어간다. 905년 나움은 오흐리드 호숫가에 수도원을 세웠고, 그의 이름이 이 수도원에 붙여졌다. 특별히 나움은 신자들의 고백을 통해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는 의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로이트보다도 1000년이나 앞서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를 실행했던 것이다. 그는 910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료 클레멘트가 그의 시성(諡聖)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나움 수도원에 그의 무덤이 있다.

오흐리드 호숫가에 서 있는 세 개의 동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키릴 형제와 그의 두 제자 이야기는 성경의 스승과 제자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있고, 바울과 디모데의 이야기가 있다. 더 나아가 예수의 제자된 나와 가르침을 나누는 제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오흐리드의 자연이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답지만, 이곳에 얽혀 있는 선교의 역사는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자연보다 사람이 먼저이며, 길보다 언어가 먼저이다. 키릴 형제와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했다. 발칸 반도 복음화에 끼친 영향력 때문에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오흐리드, 오흐리드에 가면 키릴 형제와 그의 두 제자 클레멘트와 나움이 있다.

하경택 교수 / 장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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