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정신으로 시작한 여전도회

연합정신으로 시작한 여전도회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19

한국기독공보
2023년 05월 18일(목) 09:41
'여전도회 하나님의 나팔수' p.137
여전도회는 연합정신으로 시작한다. 미국 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세 교단의 연합 정신을 살리되, 모든 골격과 여전도회의 정신, 정관 등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부인조력회에서 따왔다.

이 세 교단을 통합하는 여전도회연합회의 통합의장을 맡은 서서평 선교사는 조직 초기부터 사무총장을 맡아 50여 개 지회를 관리했다. 회장 역시 각 교단이 돌아가면서 선교사들이 맡았다. 1기 회장에 이루이시 캐나다 선교사가, 2기 회장에 평양 숭의여학교 교장을 맡았던 북장로회 선교사 부애을이, 3기와 4기 회장엔 광주 남장로회 선교사 도마리아가 맡았다.

서서평은 사무총장을 맡다가 4기에 도마리아 회장 재선 때에 부회장을 맡았다. 이후 5차 총회가 열리는 선천에서의 모임에서 당연직으로 회장직을 맡는 수순이었으나, 본인의 고백처럼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5차 총회부터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공백을 제자이자 동역자인 김필례가 이어받게 된 셈이다.

이처럼 여전도회연합회는 어떤 직책을 교단이나 지방색에 의해 나누기보다 연합 정신이 살아 있는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체로 성장해 나갔다. 미국 장로교가 독식하지 않고 규모가 훨씬 작은 캐나다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와 더불어 조선예수교장로회를 구성하고 이끌어 나가는 모양새를 취했다.

조력회는 회비를 납부할 능력에 관계없이 여자 교인이면 누구나 회원이 되도록 했다. 조력회는 여성도들의 영적 발전을 도모하고 전도사업과 자선 사업에 관심을 가지며 국내외 전도사업, 지역사업, 종교교육, 빈민구제사업, 한센병자 돕기, 젊은층 지도 등 총회가 하는 모든 분야에 참여하도록 교육했다.

지방 조력회는 한 달에 한 번 집회를 갖는다. 규모가 큰 조력회의 경우 가까운 이웃을 중심으로 원주회, 곧 분회를 만든다. 원주회는 지금의 구역회와 같다. 원주회는 일주일에 한번 기도회를 갖고 친교를 나눈다. 본회 때는 각 원주회 별로 성경을 암송하며 성미를 거두고 사업보고를 한다.

부인조력회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조직은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되자 여전도회는 지하로 숨어서 활동하다 해방 후에 부인회 또는 여전도회로 등장해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1925년 쉐핑의 보고

아래 글은 1925년 7월 미국 장로교 부인조력회 총회에 윈스보로 여사가 쉐핑의 보고와 한국 내의 부인조력회 활동상황을 간추려 보고한 내용이다.

조직 규모가 큰 외국의 여성 조직이, 한국에서도 효과를 발휘한 것은 광주에 있는 엘리제 쉐핑 덕이다. 이 공동체는 몇 백 명의 여성으로 구성돼 모두 원주회(서클)로 나뉘어 좋은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조력회에서 출간한 프로그램 책자들이 번역돼 한국에서 사용되도록 적용됐다.

1925년 쉐핑이 보내온 보고는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 막 전남노회 회의에 참석했다. 노회는 광주와 목포 지역에 제주와 목포 인근의 섬들까지 관장한다. 어젯밤 (광주의) 세 조력회가 음악 프로그램으로 노회 앞에서 공연했고, 9시엔 오웬기념관에서 차를 대접했다. 1925년 7월 7~10일 광주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투표와 결정에 의해 조력회가 인정받고, 노회 국내외 전도위원회에 소속됐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 우리는 노회와 함께 협력해 일할 것을 기대한다. 또 조력회 노회원들이 헌금 형태의 활동비를 지원해 줄 것을 희망했다. 내가 전적으로 바라는 것은, 조력회와 그 사역에 대한 무지에서 생기는 반대로부터 조력회를 지키고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 회의에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각자의 영역에서 사역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이다."

전라남도에는 37조력회와 110서클이 완전히 조직됐고, 연례회의에 조력회의 통계와 재정이 보고됐다. 로이스 스와인하트는 "이 여성들의 성공을 되새기면서, 윈스보로 여사가 1920년 이 땅에 방문해 조력회 조직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감동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여성들은 성경을 공부할 뿐 대부분 자신의 이름조차 없었다. 그들은 아들의 엄마로 알려져 있었고, 때로 장남의 이름으로도 불렸다"라고 기록했다.

선교부에서 오랜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윈스보로 여사의 제안에 부인조력회 조직은 한국에선 아직 시기상조로 여겼다. 단지 엘리제 쉐핑만이 한국 여성들로 조력회 구성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쉐핑은 한국 여성의 능력과 잠재력을 믿고 노회 내 일부 교회들부터 시작하게 했다. 그녀의 꾸준하고 인내심 있는 지도의 결과로 지도자들이 양성됐고, 그들은 2년 만에 간단한 규칙과 서클로 열매 맺은 커다란 계획과 조직 운영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듬해 봄, 훈련이 시작됐고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대중 집회에서 조직화된 노력이 교회 사역 확장을 위해 격려되고 추진됐다. 가장 총명한 여성들에 의해 미래지향적인 움직임의 가능성이 발견됐고 마침내 그것이 출범됐다.

"그 결과는 우리의 가장 야심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우리는 한국 부인 조력회가 위대한 미래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 사람이 먹는 쌀 십분의 일을 모은 작은 쌀 주머니(성미)를 통해, 우리 여성 선교사들은 한국 여성들이 서클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노라복 여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효율적으로 서클과 조력회 모임을 위한 프로그램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프로그램은 다른 미션 공동체에서도 채택됐다."

최근 범 한국 전도캠페인에서 전주조력회는 회원을 두 명씩 짝 지어 다른 지역을 방문해 전도하도록 했다. 그래서 외국의 우리 여성 조직은 비록 시작은 작은 출발이었지만, 훌륭한 여성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미국 조력회 사역처럼 한국 땅에서도 일취월장 하고 있다. / 할리 P 윈스보로(Hallie P. Winsborough)

1925년은 그동안 노심초사하며 키워온 부인조력회가 7월 초에 열린 전남노회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아 노회의 주력 사역으로 편입된 해다. 노회에서 시작된 부인조력회가 날개를 단 셈이다.

더욱이 미국 부인조력회는 미국 장로교가 선교지로 일구어 놓은 브라질, 중국, 일본, 멕시코와 아프리카 선교지 가운데서 부인조력회를 맨 처음 도입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해외 선교 현장의 첫 열매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 부인조력회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성경의 진리가 이 조그마한 나라 조선 땅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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