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인조력회를 세워주세요"

"한국의 부인조력회를 세워주세요"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18

한국기독공보
2023년 04월 13일(목) 16:03
1928년 대구 신정교회에서 11개 연합회가 모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를 창립했다.
서평은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에서 부인조력회를 조직한 다음, 지역을 순회하면서 각 교회마다 조력회를 조직해 나갔다. 여전도회 발전에는 이일학교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학생들이 금정교회에 출석하며 조력회 일을 도왔다. 학생들은 확장 주일학교와 시골 교회 사역을 통해 부인조력회를 전라남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면 부인조력회는 그 숫자가 크든 작든 믿음의 공동체를 이어주고, 성미를 통해 가난한 교회와 이웃을 돕는 역할을 했다. 당시의 조사와 목회자가 넉넉한 사례금을 받지 못하던 시절에, 부인조력회가 모아주는 보리쌀 몇 말이 가난한 목회자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수단도 됐다.

1923년에 전주, 1924년에 목포, 1925년에 제주, 1927년 군산 순으로 부인조력회가 설립됐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라는 말씀처럼, 1930년에 조직된 순천 부인조력회는 설립과 동시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어갔다. 미국 장로교 부인조력회가 순천 지방으로 위길순을 부인사역을 위한 전담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1925년 전남노회가 부인조력회를 공식적으로 인준했다. 광주에서 시작된 여전도회는 이후 전국으로 확장됐다. 나아가 여러 지방 여전도회를 모아 전국연합회로 만들어나갔다.

192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서서평 선교사에게 부인전도회 연합회 구성과 조직에 관한 전권을 맡기고, 미국장로교와 호주, 캐나다 장로교가 연합해 여전도연합회의 구성을 요청했다. 당연히 미국 남장로회 부인조력회의 모델을 따라 정관도 만들고 운영세칙도 만들었다. 이 일에 김필례도 함께 도왔다.

1926년 9월 11일, 제1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됐을 때, 여전도회 대표들은 그곳에서 전국연합회 조직을 위한 발기회를 갖기로 결의했고, 16회 총회에서 허락을 받아 창립준비를 시작했다. 1927년 원산에서 모인 제17회 장로회 총회의 허락을 받아 11개 지방위원회가 모여 전국연합회를 조직했다. 금정교회를 비롯해 전남지역에 속한 교회는 부인조력회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도회 전국대회라 했다. 결국 1928년, 제17회 총회에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조직을 승인받게 된다.

창립총회는 1928년 9월 9일 대구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11개 연합회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열렸으며 캐나다 선교부의 이루이시 선교사가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초대부터 4대 회장까지는 선교사들이 회장을 맡다가 5대에는 평양고등성경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한영신이 한국인으로 첫 회장이 되면서 그 후로 한국 여성들이 사역을 주도하게 됐다.

여전도회 조성과 전국 조직시기에 통합의장을 맡은 서서평 선교사는 1928년 첫 번째 총회에서 11개 지방 연합회를 주관하는 사무총장을 맡았다. 당시에는 호주와 캐나다, 미국 장로교가 번갈아 가면서 책임을 맡는 연합적 성격이 더 강했다. 어차피 실무를 관장하는 서서평 선교사의 몫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던 때였다.

장로교 여전도 연합회의 사무총장직을 맡아 50개 지회들의 매달 행해지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왔으며, 순회의장뿐 아니라, 여전도회 가운데 하나를 책임도 져야 했습니다. 국내에 새롭게 두 군데 여전도회 지부를 창립하였습니다. 5개 지회에 순환 프로그램과 기도 프로그램을 보급하면서, 발간된 모든 자료를 준비하여 한 해 내내 우리 사무실에서 50개 지회들로 발송하였습니다.

노회 전체가 매년 2월 15일을 기도의 날로 지켰고 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는데, 그것은 그동안 (미국의) 부인조력회가 지속적으로 사용했던 자료들을 보내준 것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조직된 장로교 여전도회는 주님을 향한 섬김으로 매우 큰 기쁨을 얻었으며 600명 넘는 이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드려진 자발적인 헌금은 현금과 작정한 총계가 165엔이었는데, 우리가 속한 노회에서 드려진 여성모임에서 가장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지난 9월 조선예수교 장로교 총회에 우리 노회의 대표인 한 여성과 함께 참석하였고 총회 내의 여성사역을 조선총회 선교부와 하나의 기구로 통합하는 일에 큰 기쁨으로 거들었습니다. 지난 7월 우리 여전도회 연구소에서 '구약의 여성들'이라는 한 과목을 10일간 가르쳤습니다.(1928년 여전도회 관련 보고)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목적은 '그리스도 복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총회 내외지 전도부 사업을 찬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33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서평의 조력회 계획과 프로그램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것은 서평이 한국여성 계몽운동에 힘을 쏟은 결과였다. 서평은 여전도회가 이름 그대로 총회를 협조해 나가는 단체가 되어야 하며 결코 경쟁적인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노라복(Knox) 부인이 서평을 인터뷰하면서 "당신의 부인조력회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자 그는 정색을 하며 답했다. "당신의 조력회라니요? 아닙니다. 조력회는 엄밀히 말해서 한국인에 속한 것입니다." 그는 조력회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 여성들이 리더십과 청지기 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서평은 여전도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부인조력회는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를 제외하고 미국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으로 통했다. 그는 미국 기독교 부인조력회의 좋은 점뿐 아니라 미국장로교회의 여성사역에 관한 헌법과 부칙도 번역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간행한 책자와 도움이 될 만한 여러 인쇄물을 빠짐없이 번역하며 이를 차트로 만들었다. 이 일에 김필례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조력회 본부와 연락하여 모든 문서를 전달받아 한글로 번역하고 수정하여 1928년에 태동하는 한국 여전도회 연합회의 정관과 운영세칙, 교회 여전도회 운영방안 등의 기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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