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운동의 산실이 된 빛 고을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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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16

한국기독공보
2023년 03월 30일(목) 17:23
'여전도회 하나님의 나팔수' p.118
1908년 10월은 광주지역 여성사뿐 아니라 한국 여전도회 역사의 산고가 시작된 날이다. 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조직과 교회적 인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은혜를 그의 나라와 지경을 넓히는 데 헌신하려는 여성들의 자각이 구체화됐다.

앞서 김필례가 언급한 부분을 통해 광주에는 여성들의 부인전도회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들의 헌금으로 광주 내에 전도를 담당하는 전문여성 사역자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은 제주에 단독으로 여성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자력에 의한 꿈을 가진 성도들의 유기적 연합으로 성장해왔다. 노회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반대급부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믿음의 사람들이 이루어나간 사도행전적 기적이었다.

그들은 1920년 11월, 광주를 방문한 미국 장로교 부인조력회의 창설자이자 회장인 윈스보로 여사를 면담했다. 물론 이들의 만남에는 쉐핑 선교사와 김필례가 디딤돌 노릇을 했다. 이 무렵 성미를 통해 가난한 교회를 돕고 여성 사역의 비전을 나누던 쉐핑 선교사는 윈스보로 여사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러한 결과로 광주 부인전도회로 불리던 이들이 제도권으로서 조력회 내로 흡수 통합되는 절차를 거쳤다.

# 전남 부인조력회 창설 / 1922년

아래 보고서는 서서평 선교사가 그동안의 부인조력회 창설과 사역을 간략하게 서술한 자료다. 이 보고서엔 윈스보로 여사가 조선을 다녀간 이후 광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부인조력회 조직 사업이 보다 구체화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광주뿐 아니라 광주 인근 화순과 영광, 벌교와 순천, 나주와 고창, 곡성과 담양 등지에 여성 성경공부반이 개설되면 반드시 부인조력회 운영에 관한 교육과 훈련도 병행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공부가 끝나면 부인조력회 구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인조력회 조직사업을 통해 서서평 선교사의 리더십과 장점들이 드러났다. 서서평 선교사 집에서 창립된 전남 여전도회는 애당초 미국 조직의 이름으로 부인조력회 총회라고 했다. 이 전남 부인조력회 총회는 조선 예수교장로교가 1928년에 출범시킨 여전도회연합회와 연대하면서, 한편 독자적인 기구로 해방 이후까지 전라남도 부인조력총회로 불렸다.

# 조선 광주지역의 조력회 역사 : 1925년 8월 현재까지 간추린 여전도회 역사

1922년 12월 26일 광주지역의 선교회 간부들이 E. J. 쉐핑의 집에 모였다. 안건은 선교회의 해산에 관한 건이었다. 이 선교회는 지역교회 조직뿐만이 아니라, 10개 지역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회원들도 포함했다.

일부 회원들은 회비 지불에 아주 열심이었다. 사회적 논쟁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 없는, 평균 20명 정도 모이는 60개 정도의 지역회원들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하나는 회원들 간의 매우 불쾌한 상황으로 비화했다. 논쟁 주제는 '도시에서 혹은 시골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가에 대한 것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다. 양자 사이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선교회 해산에 관여하고, 실제로 건설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때 나는 거의 대부분 시골지역에서 사역했고 도시교회엔 거의 머물지 않았다.

선교회 사무실이 없어서 그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할 기회가 부족했다. 우리는 분명 종교적 프로그램들과 자선사업과 제주도의 전도부인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울 때까지, 일대일로 만나 실제 선교회의 이상에 대해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더 나은 방식으로 점차적인 교훈을 통해, 결국 1921년 조력회 시작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는 우리가 조직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에는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1922년 12월 26일까지 조직을 연기했다. 그때는 우리가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우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고 결정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는 '왔고 보았고' 반대와 무시와 조잡하게 주의 일과 교회의 사업을 행하는 방식을 '정복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비록 완벽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우리는 아직 진행 중이며 조력회는 지속된다.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날 9명의 임원들과 함께 조력회를 시작했다. ▲회장:엘리제 J. 쉐핑 <부>김창숙 ▲기록담당:배경애 ▲교신담당:임자혜 ▲회계:난흥부인 ▲역사담당:고씨 부인 ▲외국선교담당:이씨 부인 ▲국내선교담당:선우주 부인 ▲문서담당:김필례

우리는 이미 기존 선교회들을 조력회로 발전적으로 해체 재조직하는 것에 대해 충분한 조언과 동의를 얻었다. 1922년, 10개의 서클로 창립된 전남여전도회는 1925년 8월 10일 현재, 광주지역에만도 총 30개의 서클과 함께 3개의 지역 조력회가 생겼다. 우리는 아주 머지않아 북문밖(현 중앙교회)에도 모임을 조직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나병 환자교회(봉선교회)를 제외한 광주의 모든 교회에 '조력회'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기도단과 성경공부반 그리고 설교단을 조직했다. 1922년 12월 26일 조력회를 시작한 이후로 국내나 해외 선교를 위해 1507달러를 쏟아 부었다. 돈이 아예 없거나 혹은 돈을 벌 수단이 없는 여인들의 어려운 경제 형편을 생각한다면, 이 헌금은 기적과 다름 없다.

지금까지 나는 조력회의 산물이나 유익에 대한 언급 말고, 여러분에게 이 단체의 진전에 대해서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렸다. 양림교회는 실버 조력회(Silver Auxiliary)이다. 올해 말에 다른 두 조력회는 여전히 살펴볼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 드림.

E. J. 쉐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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