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꿈, 농촌교회에서 자란다

아이들의 꿈, 농촌교회에서 자란다

[ 우리교회 ] 서울노회 덕수교회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22년 05월 19일(목) 13:39
양평군 덕수리 마을 입구에 위치한 103년 역사의 덕수교회. 교회가 사용할 쌀을 수확하는 논과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보인다.
대로에서 논밭 사이의 길을 따라 교회 앞에 도착하면 하나 둘씩 민가가 나타난다.
서울노회 덕수교회 본당. 우측 앞쪽에 앙상블을 위한 연주석이 보인다.
교인들과 함께 나무를 심으며 교회 주변에 휴식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송경호 목사.
경기도 양평에서 홍천군 서면으로 향하는 단월로를 달리다 보면 가지를 넓게 펼친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대로변에서 50m 남짓, 덕수리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이 나무는 흔히 '동구나무'로 불리며 마을의 지난 시간을 보여 주는 듯 하다. 풍년이 되기를 소망하던 농경사회의 문화도 읽게된다. 그 옆에서 나란히 방문객을 맞는 서울노회 덕수교회(송경호 목사 시무)의 모습이 이채롭다.

덕수교회는 103년의 역사를 지닌 지역의 모교회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20일, 위철지 선교사(George H. Winn)가 교인 집에서 드린 예배가 출발점이 됐다. 당시 사역에 대해선 남은 기록이 별로 없다. 하지만 3.1운동 직후 기독교 농촌계몽운동이 활기를 뗬던 것을 감안하면, 덕수교회 역시 마을을 새롭게 하려는 신앙인들의 염원 속에 설립됐을 것으로 보인다.

'1951년 8월, 6.25전쟁으로 소실된 예배당을 개축하다'라는 약사의 기록은 교회가 겪은 전쟁의 풍상도 보여준다. 송경호 목사는 "고도환 집사님이 교회 건물을 사용하겠다는 북한군의 요구에 반발하다 순교하셨고, 현장을 목격한 교인은 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말했다.

휴전 후인 1957년 교회는 예배당을 증축했으며, 1969년엔 여섯 가정이 분립해 인근에 단월교회를 개척했다. 본보 디지털 아카이브에는 1960년대 활기차게 지역 선교를 전개했던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60년 12월엔 노회 동남시찰 연합사경회와 농촌강습회가, 1964년 11월엔 양평지구 교역자회가, 1965년 8월엔 노회 동남지구 연합청년총회가 덕수교회에서 열렸다.

이후로도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친 덕수교회는 2001년 3월 현재 위치에 새 성전을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당시 제정된 '목적 선언문'은 덕수교회를 '이웃과 함께 그리스도를 닮아 살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로 정의하고 있다. 이어진 2000년대 초반은 창립 100주년을 준비하는 동시에 사역의 지경을 넓히는 시기였다. 여러 교역자들이 교회를 거쳐갔으며, 전 서울노회 총무였던 이신규 목사도 이곳에서 은퇴했다.

이 목사의 후임으로 2015년 3월 부임한 송경호 목사는 그 해 여름 농촌 아이들을 위한 '돌봄교실'을 열었다. 이듬해부턴 바이올린과 플룻 교육도 시작했다. 송 목사는 2015년 부임당시를 회고하며 "아이들의 자존감이 낮아 학교에서도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이자'는 마음에 문을 연 것이 돌봄교실이었고, 자존감을 높일 방법을 찾다가 떠올린 것이 악기 교육이었다.

때맞춰 음악을 전공한 김영아 집사(밀레니엄오케스트라 이사)가 합류했고, 이제익 장로와 김 집사의 지인이 악기를 기증하면서 수업이 시작됐다. 이후 아이들은 매주일 예배 연주를 맡았다. 코로나19 상황에선 송 목사가 사용될 곡을 미리 인터넷 카페에 올리면, 각자 연습한 후 주일에 맞춰보는 방식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지역 초등학교가 쓰지 않는 악기들을 기증하면서 한때 앙상블의 규모는 26명까지 늘어났다. 마을에 악기교육 열풍이 불자 학교가 다시 연주반을 조직했는데, 이번엔 덕수교회 아이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교회 창립 100주년엔 자체적인 음악회를 열 정도로 악기교육은 활기를 뗬다.

하지만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한때 50명이 넘던 돌봄교실은 시작 때 인원인 10명 이하로 감소했다. 반복되는 감염병 대유행은 노인 중심의 교세에 그대로 반영됐다. 다행히 어르신과 어린이들 모두 온라인에 익숙해졌지만, '코로나19 이전으로의 회복은 농촌교회가 도시교회보다 오래 걸릴 것'이란 게 송 목사의 전망이다. 법적으론 50세만 넘어도 고령이지만 농촌에선 60~70대도 젊은이다. 70대 이상이 80%에 달하는 상황에서도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젊은이들의 이탈은 계속되고 있고, 송 목사는 "교회가 젊은이들과 함께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라고 전했다.

덕수교회는 최근 지역 어르신들에게 죽을 배달하는 섬김을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여전도회원들이 음식을 준비하면 남선교회원들이 전달을 맡는다. 교회 앞 논에서 수확한 쌀로 아이들을 돌보고 어려운 가정도 지원한다. 감염병 사태 이후 보건소를 찾는 어르신이 늘면서, 보건소에 모시고 가거나 약을 받아 전달하는 일도 사역의 일부가 됐다.

기자가 교회를 방문한 날 송 목사는 남선교회원들과 함께 교회 마당에 매실, 살구, 호두나무 묘목을 심었다. 마당 한쪽엔 넝쿨터널을 만들기 위해 심어 놓은 장미 묘목도 있는데, 가지를 뻗어 터널이 형성되려면 10년은 걸린다고 한다. 그사이 교회는 고로쇠와 취나물 등 특산품을 찾아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쉬어갈 장소를 꾸준히 늘려갈 계획이다. 돌봄교실도 발전시켜 온라인학습센터로 확장할 꿈도 가지고 있다. 돌봄사역에만 한 해에 1000만 원 가까운 예산이 들지만, 이제익 은퇴장로와 허영욱, 김호장 장로를 비롯한 교인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농촌교회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인구 유입은 있지만 주로 쉴 곳을 찾는 은퇴 귀촌자들이다. 송 목사는 거창한 프로젝트보다 교인들의 원활한 신앙생활에 관심이 많다. 또한 '농촌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딛게 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교회는 2016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마 7:17)'는 성구를 붙잡고, 바울의 전도여행 거리를 상징하는 '1만 7000km 말씀 행진'을 시작했다. 지역의 작은 교회지만 1만 7000km의 사명을 품고 세계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다짐이다. 성경 한 절을 읽으면 1m를 전진하는 이 걸음은 현재 600km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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