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포옹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장애인과 '포옹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 4월특집 ]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3. 교회교육과 장애인

이범성 교수
2022년 04월 13일(수) 08:22
발달장애인을 위한 신앙교육교재는 한국장애인사역연구소(한장연, 소장:김해용)에서 매우 많은 종류가 발간되어 있다.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부터, 어느 수준에서 어떠한 학습문답 내용이 필요하며 어떤 교재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떠한 신앙발달을 기대할 수 있고 그 방침에 따른 어떤 교육교재를 사용해야 할지도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부를 운영하고 있는 교회들은 많지 않다. 주로 지체, 복합장애 교우들과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발달장애 교우들과의 수고가 얼마나 클 것인가를 종종 생각하게 된다. 지체장애는 종종 복합장애형태로 발달장애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체장애인들은 함께 계획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는 일에 책임을 함께 지는 동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교우들은 주님의 전인 교회에서 주인공적인 존재들이다. 그것은 비장애인들이 교회에서 주인공적인 존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장애인을 차별하여 어두울수록 교회의 빛은 더 밝게 빛날 것이다. 이러한 주의 몸에 지체들이 세례교인들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했다(갈3:28). 여기에 '장애인이나 비장애인도 다 하나다'라는 말을 첨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본뜻을 살리면 살렸지, 훼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U. Bach 주장 인용).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보낸 첫 편지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함께 하는 하나 된 교회론을 펼친다.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8절에서).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21절).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2절),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그런데 장애인 관련하여, 사회는 과연 그렇게 어둡고 교회는 반대로 그렇게 밝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신교와 가톨릭에 속한 기독교인 비율이 30%를 웃돌지만, 장애 기독교인 비율은 5%에 불과한 한국교회는 밝은 빛을 비추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밝은가 하여, 교회를 떠나 홀로 신앙생활을 시도해 보는 소위 '가나안 성도'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유엔의 장애인권리헌장(2015)을 보면 사회는 장애인을 완전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장애인의 현실을 '배제사회'라고 규정하고, 함께 사는 '통합'사회로 돌입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전히 명목상의 통합사회에서 게토로 봉착해 있다가, 지금은 장애가 있는 상태 그대로를 완전체로 인정하고 평생을 함께 살자는 '포용사회'의 출범을 선포한 것이다.

신학이 정리하지 못한 일을 사회학이 해낸 것이다. 초중증 장애인조차도 하나님의 100퍼센트 완전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신학은 말했어야 했다. 하나님에게 실패작은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의 창조 행위 결과에는 "좋았더라"와 "아주 좋았더라"가 있을 뿐이다. 특별히 "아주 좋았더라"는 만족감을 표현한 인간 창조에 관해서, 신앙인들은 고난 속에 있지만 완전한 피조물인 장애인이 갖는 의미를 숙고했어야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은 여자와 남자가 공존하여 세상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요, 서로에게 해함이 없고 섬김만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연습하고 경험하는 길이다.

그러나 왜 한쪽은 도움을 주는 입장이고 다른 한쪽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어야 할까? 한일장신대 채은하총장이 조심스레 꺼내놓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고난에 장애인의 고난을 대입시켜볼 수 있을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것은 불경이 아니다. 그래야 장애를 고치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이 적어서이거나 하나님이 무능하셔서 그런 것이 아닌 것이 된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위한 선물로서 고백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제한적 존재'라는 특징을 갖는다. 한계가 있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다. 사람은 제한적 존재로서 저마다 다양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노벨상 수상 과학자가 온전하듯이 발달장애인도 온전하고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온전하듯이 중증 지체장애인도 온전하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완전작품인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서로가 다른 것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면서 사회적 일치를 이루는 일이다(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사회학자들의 수고한 밥상에 신학자가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 놓는 것이 허락된다면, '포용사회'를 '포옹사회'로 개명해 보면 어떨지 제안해보고 싶다. '포용'은 일방적일 수 있지만 '포옹'은 쌍방적인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범성 교수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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