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정신으로 돌아가서 먼저 나라를 통일하자"

"3.1정신으로 돌아가서 먼저 나라를 통일하자"

[ 아카이브 ] 33인 중 해방이후 생존한 이명용 장로에 대한 기사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2022년 03월 10일(목) 17:43
1953년 3월 2일자 생존한 민족대표의 생생한 술회
33인 중 해방이후 생존한 이명용 장로에 대한 기사





"… 박희도(朴熙道)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들을 중심으로 한 감리교 측과 이승훈(李昇薰) 양헌백(梁헌伯) 이명용(李明龍) 등을 중심한 장로교측이 핵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특히 평안도는 신교가 왕성하여 다른 어느 지방보다 민지가 계발되고 세계정세에 밝았기 때문에 독립운동도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1974년 2월 23일 3면)

이 원고는 '3.1운동과 한국교회'를 제목의 한영헌 교수(장신대)의 '3.1節 紀念 論壇'(3.1절 기념 논단)이다. 2월 23일자와 3월 2일자 신문에 2회로 연재된 이 논문에서 한 교수는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33인의 연결 고리 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의 참여에 대해 소개했다.

3.1 만세운동 33인 중, 기독교인은 16명이다. 이 중 장로교인은 이승훈 목사(1930년 별세), 양전백 목사(1933년 별세), 길선주 목사(1935년 별세), 최성모 목사(1937년 별세), 김병조 목사(1948년 별세), 이명용 장로(1956년 별세)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해방 이후 한국기독공보 아카이브를 통해 확인 결과 1950년대까지 생존해 있는 장로교인은 이명용 장로가 유일했다. 33인 중에 가장 오랫동안 생존했던 기독교인 인물로는 1981년에 별세한 이갑성 의원(감리교)으로 민의원과 자유당 최고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기독공보 아카이브에서 해방후 생존했던 장로교인 '이명용 장로'를 검색한 결과 28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으며, '이명용'으로 검색했을 때 36건의 기사가 검색됐다. 별세 기사는 1956년 11월 19일자 신문으로 '11월 12일 하오 4시 30분에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40 자택에서 급성기관지염으로 별세'라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이명용 장로에 대해 "고인은 二十(20)세에 예수를 믿게되어 六十(60)평생을 독실한 생활을 해왔는데 특히 질소검박하며 말없는 실행과 억센의지로 지조(志操)있는 생활을 해왔으므로 일반의 숭앙을 받아왔다"고 평가했다. 이 별세 이전까지 이명용 장로의 이름이 포함된 기사는 10건이다.

이명용 장로에 대한 기사 중 주목할 수 있는 기사는 '33人 中 生存烈士 訪問(33인 중 생존열사 방문)'이다. 이 신문은 6.25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 3월 3일자이다. 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 있다. '李明龍(이명용)장노 三·一 縱橫談(3.1 종횡담) // 政治(정치)·信仰的(신앙적)으로 끝내 守節(수절) / 三·一정신 어디로? / 老翁(노옹)·總團結(총단결)과 民族愛(민족애) 다시 高唱(고창) / 責任(책임)잇는 政治(정치)를!! / 民族主義(민족주의)로 돌아가자'

기자가 이명용 장로를 찾아간 곳은 대구 덕산동에 위치한 자택으로, 첫 만남에 대한 인상을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란으로 인하여 모든 피난민 틈에 섞이어 남하한 노옹 역시 머므는 곳에 머리 둘 곳을 마련치 못하여 이들과 함께 섞이어 大休寺(대휴사)라는 절깐 냉방 한 칸에 봇짐을 풀었든 것이라 한다. 선듯 들어설 때 풍기는 방안의 냉기는 다른 여러 애국지사와 및 유가족과 같이 아모 후원과 애낌을 입지 못한 불우 그것을 느끼게 하였다. 비록 온돌방이라고는 하나 좁은 돌장 하나 따뜻이 데울 경제도 허락 못되어 냉기를 덜기 위하여 짚을 깔고 그 우에 마대를 펴놓고 있었다. 八(팔)십이나 된 노옹의 가슴엔 내 살림 내 형편보다도 조국의 앞날을 념려하는 사려로 가득차 있는 상 싶다"

기자가 '당시의 기억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입을 연 이명용 장로는 3.1만세운동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띄엄띄엄 회고했다.

"아직도 내 귀엔 수많은 애국청년들의 천지를 진동시키는 만세소리는 쟁쟁이 들려오고 있다! 기미년 음력정월 上海(상해)임시정부에서 鮮(선)우혁 밀사를 보내여 李承勳(이승훈) 양전伯(양전백) 나 이렇게 넷이 한 자리에 모혀 밀의한 결과 李承勳(이승훈)선생이 책임을지고 平壤(평양) 吉善주(길선주) 목사를 만나고 서울에 상경 지사들과 연락하여 三월一일 거사를 약속하고 나도 같이 平壤(평양)을 거처 서울 咸태永(함태영) 목사 댁에서 몇분과 만나 동지를 규합한 후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든 것인지! 三월一일이 되어 三십인(三인이 불참)이 한 자리에 모혀 서명한 후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서 만날지 모를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니 마즈막으로 만찬이나 같이 하기로 하여 '빠고다'공원 옆 명월관 지점에서 최후의 만찬회를 열었는데 이 회가 채 끝나기 전에 한 시간 빨리 정오를 기하여 빠고다공원에서 거사를 이르긴 것이야-

우리 三십명 一행은 그 자리에서 주모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애매한 청년들이 많이 희생당할 터이니 우리들이 이자리에서 경무총감부에 통고하자고 결의를 하여 즉석에서 전화로 독립선언 주모자는 여기 있으니 차를 가지고 와서 대려가라고 하여 얼마 않되어 많은 왜관헌이 차를 가지고 와서 다려갔었어 …. 경무총감부 문전에 세아릴 수 없는 애국청년들은 운집하여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들의 지도자를 석방하라고 큰 야단을 이르켰었든 것이야"

계속해서 이어진 인터뷰에서 이명용 장로는 6.26 전쟁 중인 정부를 향해 '일언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쏟아낸 내용은 20대 대통령 선거를 마친 오늘 우리가 곱씹어 봐야할 대목이다. "적어도 위정자들은 민족이 있고야 한 국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부는 좀 더 책임 있는 정치를 해야한다. 뼈가 상하도록 노동을 하여도 그날 식비도 않되니 모든 부문이 모두 긴급하겠지만 민중의 생명은 연명시켜야 할 의무는 저우에서 져야 한다. … 八십이 된 나의 유일한 소원은 남북통일에 있다 공산주의는 인류의 공적이며 공산당은 사탄의 무리다. 그러나 지금 우리네와 같은 자주성 없고 도덕과 윤리가 부패하는 이런 민주주의는 원치 않는다. 일체의 사대주의를 배척해야 한다 배잠뱅이에 된장국을 마서도 三천만 민족주의로 우리는 도라가야만 하겠다"

계속되는 이명용 장로의 강한 어조를 취재한 기자는 기사의 말미에서 "노옹의 근육은 떨고 두 눈은 빛난다 조국을 민족을 사랑하는 소회 불덩어리 같이 내뿜는다"고 전했다.

1953년 3.1절에도 한국기독공보는 이갑성 의원과 함께 이명용 장로에 대해 취재했으며, 1954년에는 3월 1일자 신문에는 '생존의사 회상기(回想記)'로 기획했다. 이명용 장로와 이갑성 의원은 인터뷰를 통해 "3.1정신으로 돌아가서 먼저 나라를 통일하자"고 호소했다.

'이명용 장로'라는 이름은 별세 후에도 3.1절을 전후해서 계속 등장ㅎ나다. 특히 이 장로의 손자인 이대영 집사(한강교회)가 쓴 '3월이면 생각하는 분 이명용 장로'(1981년 2월 28일자)'라는 제목의 원고가 있다. 이 원고에서 이 집사는 "祖父(조부)님은 3·1운동당시 감옥에서 성경(신구약)을 40번 읽으니까 출옥되었다고 하고 출옥후 다시 40번을 읽은해에 해방이 되었다고 하셨다. 祖父님은 평생 국산품을 애용하셨다. 하루일과는 아침일찍 기동하시면 惡刑(악형)으로 인한 상처때문에 30여년간 냉수마찰을 하시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성경을 읽으시고 기도하셨다"고 이 장로의 신앙 생활을 설명했다. 또 "얼마남지 않은 餘日(여일)을 젊은 학생들에게 3·1정신을 넣어주고 싶다고 하셨다. … 조부님이 뜻대로 각 학교마다 순회강연을 하기로 하고 첫날 柳寬順(유관순) 모교인 梨花學堂(이화학당)에서 강연을 마치고 그만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나셨다"고 적었다.

박만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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