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장애인 소망이야기 "일할 권리 있잖아요"

자폐장애인 소망이야기 "일할 권리 있잖아요"

[ 아름다운세상 ] 자폐장애우들을 위한 보호작업장 래그랜느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22년 01월 24일(월) 09:41

#아버지의 꿈

내 아이는 자폐를 앓고 있다.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아이의 눈을 마주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아들. 언제나 아픈 손가락 내 새끼.

하지만 아버지는 "내 아픈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지 않는다. 대신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도 아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을 꾼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립해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습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나이는 들어가지만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래그랜느의 출발

희망제작소 래그랜느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몸이 성치 않은 애들은 집에나 있으라고 하죠. 물론 우리 가족이 힘겨울 것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걸 알지만 그 아이들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일할 권리가 있고 책임이 있고 일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자폐성 장애를 안고 있는 아들 범선 씨를 위해 아버지, 남기철 대표(밀알천사)는 2010년 5월, 자폐장애우들을 위한 보호작업장 래그랜느를 창립했다. 남 대표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100%를 출자해 설립한 사회적기업이다.

육영학교를 마친 아들 범선 씨가 첫 직장인 보호작업장에서 '정리해고'된 후 "우리가 장애인을 위한 보호작업장을 시작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씨앗이 됐다. 장애인을 고용할 작업장이 거의 없고 또 찾는다 해도 자폐장애인으로 고용되기는 더 어려웠다. 자폐장애인은 사회성이 부족하고 특정 사물에 집착하기도 해 위험한 물건을 다루지 못하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몸도 성치 않은 애를 데리고 무슨 사업을 하냐"며 면박을 주고, 또 누구는 "너무 무모한 계획이니 집에서 애나 잘 케어하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내 아들과 같은 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래그랜느의 출발이었다.


#한 알의 밀알

래그랜느는 프랑스어로 '씨앗들'을 뜻한다. 래그랜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보호작업장이 널리 퍼지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래그랜느의 주 근로자는 장애인이다.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이 뭘 제대로 할 수 있겠어?'라는 편견으로 장애인들을 신뢰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장애인 작업장에서 주 근로자가 비장애인이고 장애인은 보조 역할을 하는 이유다. 그러나 래그랜느는 자폐장애인 11명이 주근로자고, 비장애인 근로자 5명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래그랜느의 가장 주요한 사업은 수제쿠키와 빵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다. 전문 제빵사의 지도 하에 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100%핸드메이드 제품이다. 남 대표는 "우리 아이들은 남보다 느리고, 서로 인사도 전할 수 없으며 의사소통도 안되지만 빵과 쿠기를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산다"면서 "그들이 제품을 만들고 포장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식품을 작품으로 여기는 듯하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일하는 것이 즐겁다. 물론 '평범한' 대화가 불가능해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부모들의 눈은 정확하니까.

"장애의 정도도 다르고 작업 속도나 능률도 달라요. 커뮤니케이션은 더더욱 안되죠. 그런데도 작업장에 들어서는 순간 표정이 밝게 변해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거나 스킨십 같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니죠. 특유의 무표정이 전부지만 그 미묘한 변화를 부모는 금방 알아차려요. 아 우리 아이가 일을 즐거워하고 있구나. 작업장에 오는 게 즐겁구나'라고요."


#그리고 미래

작업장의 일과는 성경쓰기 부터 시작된다. 8시 30분 출근 후 직원들은 성경필사를 시작한다. 10년 동안 이어져 온 래그랜느의 전통이기도 하다. 남 대표는 "인지능력이 떨어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베껴 쓰는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예배와 말씀 앞에서는 조용하다"면서 "성령이 임재한 결과임을 확신한다"고 전했다. 필사를 마치고 9시에 작업이 시작되면 반죽과 오븐에 굽는 공정을 제외하고는 장애인 직원들이 메뉴얼에 따라 모든 공정을 해낸다. 쿠키 작업 외에도 상자 접기와 임가공 등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작업 외에 1000개짜리 퍼즐을 맞추며 집중력 향상 훈련도 한다.

래그랜느의 직원복지는 단연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예술치료 프로그램'이다. 래그랜느에서는 일만하지 않는다. 시간을 내 악기도 배우고 그림도 그린다. 연말에는 자폐장애인 콘서트도 열고 한달에 한번 도자기 수업을 받기도 한다. 쿠키를 만드는 것이 본업이지만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동안 정서적 안정을 이루고, 이렇게 새로운 경험이 또 다른 일거리가 되어 이들이 설 자리가 넓어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래그랜느도 코로나19를 피해가지 못했다. 작업장 수개월 휴업하고 매출도 전혀 없게 됐다.

'위기는 기회'라고, 래그랜느는 코로나19로 시작된 불황 앞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직원들이 조립, 인쇄, 포장해서 판매하는 '필기구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래그랜느 5층에 두번째 작업장을 열고 평판 인쇄기를 설치해 직원들이 조립한 필기구를 인쇄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가능하다면 새 직원도 채용할 생각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단 한 명의 장애인 근로자라도 더 채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래그랜느의 소망의 꽃은 지지 않는다

래그랜느는 장애인이 주 근로자가 되는 일터 외에도, 그들이 평생토록 일구며 살아갈 터전을 만드는 씨앗도 심고 있다. 지난 2011년 포천에 농장을 구입하고 자폐장애인들이 평생 자립할 수 있는 자립공동체의 씨앗을 뿌렸다. 매월 2회 직원들에게 농사훈련을 진행 중이다. "언젠가 부모들이 떠나도 자폐장애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남 대표는 "기회가 되는 이들을 위한 작업장을 계속 세우고 싶다"는 꿈을 전했다.
최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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