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교회 사역은 함께 오래 사는 것

농촌교회 사역은 함께 오래 사는 것

[ 현장칼럼 ]

김영위 목사
2022년 01월 06일(목) 10:12
김영위 목사
나의 첫 단독목회는 나를 청빙하려고 찾아온 일곱명의 교회 청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단, 그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필자와 함께 한다면 가겠다고 나의 조건을 그들에게 제시하였다. 1992년 11월 30대 초반, 이력서 쓰지 않고 청빙을 받아 간 교회는 단일 리단위 교회로 세 마을이 교구의 전부인 전형적인 자립대상 농촌교회였다.

오직 '젊다'는 것 한가지로 좌충우돌하며 첫 담임목회를 하였다. 교회에 부임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3년쯤 되니 교인들이 "이제 다른 교회로 갈 것이냐?", "우리랑 오래 살자"며 자꾸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임지를 이동하겠다는 말도 안했는데 왜 그럴까 해서 전임자들의 재임기간을 조사해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부임한 때가 7대 교역자로 교회 설립 14주년이었으니 평균재임기간이 2년 정도 되었고, 어떤 분은 6개월, 또 어떤 분은 1년 만에 임지를 옮겼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5년과 10년의 장단기 목회비전을 선포하였다. 자립대상교회로는 생각할 수 없는 비전을 제시하니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바울 선생의 말을 외치며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 지역 주민을 제1교인, 제2교인, 제3교인으로 구분하였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교인은 제1교인,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나 교회에 우호적인 지역민은 제2교인,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은 주민은 제3교인으로 구분하고, 우리 교회 전 지역주민이 교인이라는 마음으로 지역민과 함께 하는 목회를 했다. 그 결과 처음 부임할 때 그리 많던 제3교인이 점차 없어졌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던 교회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하여 지역사회를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애경사를 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행사시에 요긴하게 사용하도록 평상과 대형선풍기 등 지역마을에서 필요한 것을 전달하니 마을 주민들이 좋아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교인 비교인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위로금을 갖고 가서 위로해 주고, 병원에 입원하면 병문안 가서 위로금을 전달하고 기도해 주겠다고 하면 믿지 않는 분들도 고맙게 생각하고 퇴원하면 인사를 오는 일들이 생겼다.

교회 재정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은 선교사업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여 지역사회 단체와 각종 행사에 후원금을 내고, 지역의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얼굴을 내미니 점차 교회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이 바뀌어졌다.

중·고, 대학생들에게 매년 학기 초에 도서장학금을 주며 국내외 선교여행을 다녀오고, 노인들을 위한 경노대학을 운영하고, 지역에 민원이 발생하면 앞장서서 문제 해결을 위해 뛰었다.

교회 부임한지 15년, 비전 선포한지 10년 만에 1000여 평의 대지를 확보하여 200여평의 예배당 및 교육관, 팬션을 황토벽돌로 채무 없이 건축하고, 100여 명의 출석교인에 1억 이상의 예산과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교회 건축의 과정에서는 전 지역민들이 건축헌금을 개인별 혹은 반별로 해 주었고 건축할 때 외쳤던 주제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역민이 기뻐하는, 온 교우가 기뻐하는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할 수 있었다.

교회 건축과정에서의 교인들의 헌신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방문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요즘 누가 이렇게 예배당을 건축하느냐? 진짜 예배당 건축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17개월 동안 황토벽돌을 직접 찍어 만들고 밤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일을 했다. 21년 4개월 동안의 농촌교회 사역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김영위 목사 / 총회서부지역농어촌선교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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