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신학의 주제에 더 깊이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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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월특집 ] 총회주제 해설 7,.교회사에서 살펴 본 교회의 전염병 대처 사례

송인설 교수
2021년 10월 19일(화) 11:03
팬데믹은 의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지 않고 발생한다. 모두가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인다. 팬데믹 상황에서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교회는 또 어떻게 대처했을까?

초기 교회의 전염병 대처 사례

근대 이전 시대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없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몰랐다. 종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신전의 사제들은 피신했다. 신전에 전염병을 위해 기도하러 오지도 않았다. 이교 신앙에는 신들이 인간사를 돌본다는 믿음 자체가 없었다.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들을 달래기는 했으나, 신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철학자들은 그저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

초기 교회는 달랐다. 교회라고 치료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는 복음이 있었다. 교회는 전염병을 치유하지는 못해도 환자를 버리지 않았다. 평소대로 병자를 돌보았다. 환자를 유기하지 않고 끝까지 돌보았다. 많은 교회 직분자들이 병자를 간호하다 죽었다. 병자를 간호하다 죽은 이들은 순교자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 교회의 간호 효과는 대단히 컸다. 현대 의학 전문가들은 약물을 전혀 쓰지 않고 성실히 간호만 해도 사망률을 삼분의 이 정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집단보다 많이 살아남았다.

중세 후기 교회의 전염병 대처 사례

1347년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이 발생했을 때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초기 교회는 제국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가정교회 중심으로 교회 신자들만 돌보면 되었다. 중세 시대는 교회가 국가와 더불어 사회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기독교 세계였다. 대륙 규모로 닥친 전염병 앞에서 교회는 국가와 뾰족한 대책 없이 큰 곤경을 당했다.

우주가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실체라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수도원이 폐허가 되었다. 일반 신도들은 미신에 빠져 들었다. 전염병의 공포, 지옥의 공포,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 성 유물 숭배, 유물 매매가 횡행했다.

교회는 할 말을 잃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밤새 기도해도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신의 징벌이라는 말도 설득력이 없었다.

종교개혁 때의 전염병 대처 사례

흑사병은 유럽에서 17세기 중반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종교개혁 때도 흑사병이 발생했다. 1519년 8월에서 12월 사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 1527년 7월 말 비텐베르크 시에 흑사병이 발생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200여 명의 학생에게 종교개혁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8월 10일, 루터에게 피신을 명령했다.

그러나 루터는 목사 요하네스 부겐하겐과 부목사 게오르그 뢰레르, 요하네스 만텔과 함께 비텐베르크에 남았다. 남은 학생들에게 요한1서와 디도서를 강의하면서 병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위로하며 보살폈다. 루터는 자기 집을 병원으로 만들고 환자를 받아들이고 돌보았다. 루터는 그 해 많은 병으로 시달렸다. 현기증, 이명 현상, 뇌 빈혈증,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해 그는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를 작사 작곡했다.

루터는 믿음이 약해 피난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를 돌보는 이들을 칭찬했다. 흑사병을 하나님의 형벌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루터는 특별히 책임 있는 사람 즉 목사와 의사와 공직자는 남아서 환자와 남은 자들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염병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테스트라고 보고, 서로 섬기고 돌보자고 권면했다. 루터는 현실적이고 신학적인 권면을 통해 자신이 주장한 이신칭의 복음을 확증했다고 평가된다.

근대 이후 전염병과 교회의 대처 문제

20세기 인류는 의학과 세균학의 발달로 전염병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세균과 바이러스의 생명력은 인류의 의학 기술보다 강했다. 20세기에도 팬데믹은 계속 발생했다.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여러 번 전염병을 일으켰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발생했다. 당시 18억 인구 중 5억이 감염되고 1억 명이 죽었다고 한다. 1919년에는 아시아로 전파되어, 일본에서 39만, 우리나라에서 14만의 희생자를 내었다. 1950년대 말 아시아 독감, 1960년대 말 홍콩 독감,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메르스, 2019년 코로나까지 신종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전염병을 일으켰다.

코로나 사태, 한국교회에 새 도전

21세기 코로나 사태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교회 예배의 자유와 국가의 방역 지침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다원주의 사회로 변해 있었다. 전염병 앞에서 세속 국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해법이 복잡해졌다. 교회는 우선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국가의 전염병 대처에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민 사회의 소수 일원으로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한 한국 사회에서 외면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교회의 언어가 아니라 사회 공동선의 용어로 발언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미래 한국 사회에서 소수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며, 공공 신학의 주제를 더 깊이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송인설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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