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민수 목사 提唱(제창) '성미운동'

배민수 목사 提唱(제창) '성미운동'

[ 아카이브 ] 1952년에 첫 소개...이전 성미, "자기교회 교역자 생활을 보태기 위해서"
배 목사, "순전히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기 위하여 하는 운동"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2021년 09월 07일(화) 17:05
배민수 목사로부터 시작된 성미운동을 특집으로 다룬 1953년 3월 23일자 신문 2면.
"最近 배민수 博士로부터 提唱된 誠米運動도 決코 그것이 적은 運動은 아니다. 한끼에 한수깔식 百萬 信徒가 떼어 모은다면 大두로 一千두 하루 二食 計算으로 한다면 四百石이 된다."(한국기독공보 53년 1월 5일자 1면 '불기둥')

한국교회의 선교 초기부터 나눔 운동이 있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구호활동 등과 같은 큰 규모도 있었지만, 이웃을 돌아보는 교인들의 이웃사랑을 담은 작은 규모의 구호활동도 끊어지지 않았다. 1953년 1월 첫 주(5일) 신문 칼럼 '불기둥'에서 '성미운동'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미 한 달 전인 1952년 12월 15일자 1면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한국기독공보를 통해 소개된 '성미운동'은 농촌운동가를 잘 알려진 배민수 목사 제창(提唱)으로 시작된다.

'救國救民運動인 誠米運動(구국구민운동인 성미운동)'을 제목의 기사는 배민수 목사가 성미운동을 제창한 것을 기사화하면서 성도(聖都)교회에서 제정한 규약을 소개했다. 이 운동은 각 교회 단위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소개된 규약은 "一. 目的은 그리스도의 새 誠명에 立脚하여 相호相助의 生活을 實踐한다. 一. 위의 目的達成을 爲하여 極貧者를 爲하여 1 每戶에서 誠米를 貯蓄하되 每食口의 한술 比例로 한다(貯蓄한 誠米는 主日마다 敎會로 持參한다) 2 病者의 施療를 알선한다 3 失職者에게 職業을 알선한다. 一. 兄弟의 均等生活을 爲하여 生産及協同組合을 장勵한다. 一. 區域마다 區域長을 두고 그 아래 班長을 두어 誠米를 督勵하고 兄弟의 生活實○를 調査하여 救濟對象者를 報告한다. 一洞을 區域으로 하고 五戶로 班을 짓는다"이다.

1953년 3월 23일자 2면 기사에서는 배 목사가 제창하기 이전에 있었던 성미운동에 대해 "과거의 그것은 자기교회 교역자들의 생활을 보태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성도교회의 성미운동은 ... 순전히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기 위하여 하는 운동"이라고 소개했다. 이 기사는 '쌀 한술에 基督敎 傳統的(기독교 전통적) 兄弟愛(형제애)는 蘇生(소생)한다'라는 제목의 특집이다.

배민수 목사는 이 기획에서 '團合(단합)은 이러케 偉大(위대)하다'는 글을 통해 "... 성도교회의 성미운동은 교회○○운동으로 교인은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하고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계명의 실천으로 하였다. ... 적은힘을 합하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말로만 떠들던 이상을 사실로 증명하게되었다. 적은일에 충성하면 큰것을 마○다는 진리아 이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획에서는 성미운동을 위한 교회내 조직을 하는 것부터 성미에 참여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조직과 운영에 대해서는 "회장은 목사가 되고 서기와 회계를 두고 평의원 및 사람을 두어 실행○를 조직한다. 그리고는 각구역에 구역장을 두고 그 아래 반장을 두고 성미운동을 독려하고 또 자기구역안에 구제받을 사람을 조사하여 회장에게 보고하면 그 보고를 임원회에서 검토하여 구제를 실기한다"고 설명하고, 성미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미는 주부(主婦)가 끼니마다 밥쌀을 뜰때에 ○○기로 하고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자기식구 전체가 먹을만한 쌀을 ○놓고 그 쌀에서 매식구별로 한술식 더러내서 딴주머니에 저축한다"고 자세하게 안내 했다.

한국기독공보는 같은해 11월 23일자 사설에서 '쌀 한 술 뜨기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다. 사설에서 "主婦가 아침과 저녁에 밥쌀을 뜰때마다 몬저 가난한 兄弟를 爲하여 祈禱하고 自己食口의 平常的으로 먹는 數量을 떠놓고 그 中에서 每食口 比例로 쌀한술(匙)식을 떠서 끼때마다 貯蓄하였다가 主日날 예배당에 갈때 가지고 가서 聖米蒐集箱에 넣는 것이다"라며 참여를 당부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성미운동은 일시적인 운동이 아닌 지속적인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음도 계속되는 지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64년 11월 28일자 3면에 소개된 후암성결교회 성미운동을 통해 성미운동의 지속성과 함께 장로교를 넘어, 다른 교단에서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는 "서울에서도..."로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성미운동은 도시 보다는 농어촌 등 지역에서 더 활성화 됐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한 1974년에 개 교회 여전도회를 찾아 취재하는 한국기독공보 연재 기획 '여전도회 순례'에서 각 교회 여전도회 조직에서 '성미부장'이 빠지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기사를 통해 성미 운동이 교회내에 깊이 뿌리 내리고, 또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밖에도 각종 구제기금 충당 기사 중에 '성미'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미는 북한에 대한 구호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97년에 또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북동포돕기비상대책기구를 발족하면서 '평화의 성미 보내기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은 NCCK 산하 1만 4000여 교회의 100만 가정이 각각 북한 주민 한 사람 식비를 책임지는 운동으로 배민수 목사가 1950년대에 시작한 성미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는 이 때에,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며 부엌 부뚜막에서 이뤄졌던 '성미운동'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박만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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