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레함 1973년 여의도 집회, 300만 운집

빌리 그레함 1973년 여의도 집회, 300만 운집

[ 아카이브 ] 아카이브로 보는 한국교회 현장
'한국교회 연합, 대 사회적인 이미지 확보' 기대 담아 보도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2021년 08월 10일(화) 13:20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목사 집회
1956년 3월 5일 1면, 빌리 그래함 서울운동장 집회 보도 내용


한국교회 역사에서 '여의도광장'은 의미가 있다. 여의도광장이 1971년 처음 조성될 당시 이름은 '5.16광장'이다. 국가의 큰 행사들이 이 광장에서 개최됐다. 특히 이 곳에서 국군의 날에 열린 국군의날 행사는 막강한 국방을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알리는 자리가 됐다.

한국교회 또한 1970, 80년대에 이 곳에서 대형 집회를 열면서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국내를 넘어 전세계에 소개해 왔다.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드리던 부활절예배가 하나로 통합해서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로 시작한 곳이 바로 여의도광장이다. 여의도광장이 공원으로 개발되면서 예배 장소가 장충체육관으로 옮겨진 1996년 이전까지 한국교회는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든 교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여의도에서 전국 규모의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졌다.

여의도광장이 한국교회 성장의 상징으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이 1973년에 있었다. 세계적인 부흥사로 손꼽히는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광장에서 연인원 300만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를 연 사건이다.

한국기독공보 아카이브(소실분 제외)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에 대한 이름은 1952년 성탄절을 앞둔 12월 22일자 1면이다. '忠武廣場에 全敎派雲集(충무광장에 전교파운집)'을 제목으로 하고 부제로 "'하나님의 使臣(사신)으로 來韓(내한)했다', '그래함 博士(박사) 來韓(내한) 第一聲(제1성), 咸副統領(함부통령)과 感激(감격)의 握手(악수)'"가 달렸다. 또 본문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를 '미국이 낳은 세계적 대부흥사'라고 소개를 하며 15일 일행 3인(피얼슨 박사, ○손 박사, 기록을 주로 맡은 이)과 함께 귀국했으며, 충무로대광장에 설치된 임시 가설강대에서 강연이 진행됐음을 보도했다. 통역은 한경직 목사가 한 것으로 전한다.

또 같은 신문 2면에서 메시지 내용을 속기로 정리(한경직 목사 통역)해서 게재하기도 했다.

1952년 충무대광장에서 열린 강연이 빌리 그래함 목사의 한국방문 첫 집회였으며, 두 번째 집회는 1955년 12월 19일 1면에 1단 단신 기사로 '빌리 그래함 내한'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명년 2월 25일 귀국해서 27일 특별집회를 갖게 되었다'고 안내했다. 그러나 당시 빌리 그래함 목사가 NAE에 소속해 있고, 이번 귀국과 특별집회가 NCC가 주도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한 질문이 있음을 반영한 듯 한국기독공보는 1956년 2월 6일자 1면 해설기사로 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기사에서 논란에 대해 한국기독공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NCC는 WCC의 노선대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하는 단체요, NAE는 WCC의 노선을 반대하는 처지에 있으므로 NAE에 속하는 인사가 NCC의 초청에 의하여 내한하게 될 때 의아심을 품기 쉽다. 그러나 외국에 있는 NAE의 인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방도로서 그 나라의 실정에 의하여 대중적 집회 가능성을 고려하여 초청에 의하는 아량이 있다. 뿐만 아니라 NCC는 각 교파가 단체적으로 연합사업을 하는 기구이요. NAE는 개인적 동지간의 결합단체이므로 구성된 성격의 차이가 있는 까닭에 빌리 그래함식의 각국집회는 그나라 실정에 의하여 집회되었다. …"

1956년 3월 5일자 1면에 '빌리 그래함 박사 전도강연'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전도집회 기사는 '아시아전도 여행 중에 한국을 두 번째 내방한 빌리 그래함 박사'라고 소개하며, 2월 26일 오후2시부터 집회 장소인 서울운동장 제1그라운드에 8만명이 회집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내용을 보면 "그래함 박사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세계 각국 교우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다고 하며, 한국을 고향과 같이 사랑한다고 하였다. 특히 그래함 박사의 부인은 한국에서 공부한 일이 있으므로 한국을 기억하고 문안을 부탁하더라는 말을 하였다"고 기록했다.

1973년 6월 9일 1면 빌리 그래함 여의도 집회 관련 낙수 기사.
서울운동장 집회이후 빌리 그래함에 대한 기사는 지속해서 지면을 장식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집회 일정은 물론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내용까지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의도광장에서 열리는 집회를 알리는 서막 기사는 1971년 3월 13일 1면에 '빌리 그래함 집회 준비위'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서 준비위원장에 한경직 목사와 서기에 김장원 목사가 선출되었음을 보도하면서 1972년에 빌리 그래함 대전도집회 준비를 착수했음을 알렸다. 한국기독공보는 "… 72년도에 있을 빌리그래함목사 대전도집회 준비를 위해 모인 이날 회의에서는 우선 빌리그래함목사집회를 72년도에 개최하기로하고 12일간에 걸쳐 서울에서 6일 지방(대구 부산 대전 광주)에서 6일간에 걸쳐 서울은 장충체육관과 서울운동장에서 하루3차례에 걸쳐 실시한다는 기본방침을 확정하고 시내 각 교회가 준비기도회 및 특별집회를 준비키로 했다. …"고 보도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25일자 7면 보도된 기사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회 준비위원 빌리 그리스 박사가 내한해 집회 준비를 보다 구체화 하고 있음을 알린다. 1972년 2월 26일자 7면에서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도 교단실무자와 회의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위한 특별집회로 개최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초 예정했던 1972년 집회는 이루어지지 않고 1973년으로 넘어간다. 1972년 9월 16일자 신문 6면에서 '73년도의 빌리 그래함 목사의 한국집회'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재구성된 것을 보도한다. 이 때도 한경직 목사가 준비위원회장을 맡고 명예회장·백낙준, 부위원장에 홍현설 김옥길 김윤찬 조향록, 총무에 오재경 등으로 역할을 분배했다. 이렇게 1973년 빌리 그래함 목사 전도집회 준비가 시작됨을 보도했다.

이렇게 준비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 서울대회'는 1973년 5월 30일 오후 7시 30분에 '여의도 5.16민족광장'에서 열렸다. 한국기독공보는 대회에 앞서 1972년 9월부터 관련된 엄청난 분량의 기사를 쏟아 냈다.

1973년 3월 3일자 '빌리 그래함 대 집회를 앞두고'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번 집회에 대해 대한 기대를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의 聯合(연합)의 힘 誇示(과시)할 계기되라'는 부제에서 말해 주듯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한국교회의 연합과 대 사회적인 이미지를 확보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빌리 그레함 박사의 대부흥회를 계기로 우리 한국교회는 연합해서 복음 선교의 전선을 전국적으로 펴기를 바란다. 전국민을 복음화하는 운동을 전개하려면 전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단결하여 복음선교의 전선을 펼 때 우리 교회는 힘 있게 선교할 수 있다. 이 기회에 한국의 만여 교회와 4백여 만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서 전국민의 복음화운동에 선교의 봉화를 높이 들도록 해야겠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과 선교활동을 통하여 우리 국민에게 새로운 삶의 길과 희망을 보여주어야 겠다. 우리 국민의 사는 길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전국민으로 하여금 깨닫도록 해야겠다."(1973년 3월 3일자 2면)

1973년 5월 30일 열린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집회 첫 날 분위기를 한국기독공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12만평의 여의도 5·16민족광장에 51만 6천여 명이 운집, 대회장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국내외 정치 경제 학계 연예 등 각계 인사와 국내외 보도진 1백여 명의 대회취재에 열을 띈 첫 날 대회는 6천여 성가대의 우렁찬 '오직 소망은 그리스도'가 울려퍼진 자리에 빌리 그래함은 자신이 50여 국을 순방 집회했으나 한국의 집회는 2천년 기독교 사상 가장 큰 역사적인 전도의 첫날이며 한국이야말로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면에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역설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한 자는 일어서라고 하자 2만명이 일어나 대회 첫날의 감동 깊은 서장을 장식했다."(1973년 6월 2일 1면)

한국기독공보는 전도집회를 마무리하고 발행한 6월 9일자 신문 사설(제목:교회의 團合(단합)과 새 使命(사명). 부제:민족 중흥의 긍지와 용기 가져야)을 통해 "첫날 저녁 집회에는 51만, 둘째날 저녁에는 46만, 셋째날 저녁에는 48만, 네째날 저녁에는 65만, 마지막날 주일 오후에는 110만의 인파가 모여서 여의도의 광장을 덮고 넘쳤다"고 보도하며 다음과 같이 집회를 정리했다.

"우리 교회는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를 통하여 얻은 긍지와 용기가 전도의 정열을 살려서 전민족복음화 운동에 총집결하기를 바란다. 성령강림절을 앞둔 '빌리그레함' 전도대회는 한국의 성령강림절의 역사를 이룰 뿐 아니라 세계의 성령강림절의 역사를 이룰 줄로 믿는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 있어서 실현하여 오늘의 구원을 역사의 현실 가운데 이루기를 바란다."(1973년 6월 9일자 2면)

박만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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