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평화에서 적극적 평화로

소극적 평화에서 적극적 평화로

[ 6월특집 ] 평화의 길 멀고 험한 길인가4 - 평화를 위한 폭력은 없다

노치준 목사
2021년 06월 21일(월) 14:09
우리 인생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평화를 원한다. 또한 전쟁을 하면서도 그 목적이 평화를 위해서라는 모순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면서 대동아공영(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하였다. 북한은 6.25 남침을 하면서 남조선 인민의 해방과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여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전쟁이 한국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평화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평화이론가요 평화운동가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은 평화를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구분하였다. 단지 전쟁이나 물리적 폭력이 없다는 의미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물리적 힘으로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해치는 직접적 폭력이 해소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법이나 제도와 같은 사회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구조적 폭력, 사상 · 이데올로기 · 종교 · 전통 · 담론 등의 형태로 가해지는 문화적 폭력 등이 모두 제거되어 해당 국가나 사회 구성원의 행복 · 복지 · 번영이 보장되는 평화를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샬롬)나 신약성경의 평화(에이레네)는 모두 적극적 평화의 개념이다.

현실 정치(real politics)의 원리에 따라 국가를 이끄는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소극적 평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정치지도자들은 적의 물리적, 군사적 공격을 막기 위해서 무기를 준비하고 국방을 튼튼히 한다. 적이 공격해 온다 해도 적을 퇴치하거나 적이 승리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과 대만이 전쟁을 하면 중국이 이기겠지만, 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할 수 있고 북경이나 상해 등 중요 도시가 공격을 받아 대만을 점령해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소극적 평화 속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소극적 평화는 군사력과 같은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폭력으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간의 분쟁이나 특정 국가 내부에서의 분쟁이 있는 경우 폭력으로 이루어진 평화는 언제나 불완전한 평화이다. 아무리 강력한 폭력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는 없다.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폭력을 가지고는 상대방의 전투력이나 영토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의 저항 의지까지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극적 평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상대방이 군사력을 키워서 저항할 수 있다. 다른 세력과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서 저항할 수 있다. 더 나가 게릴라전이나 테러의 방법으로 저항할 수 있다.

폭력을 이용한 소극적 평화의 추구는 '불균형의 역설'이 작용한다. 더 큰 폭력을 가진 세력은 상대방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하여 불균형한 폭력을 사용한다. 지난 5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는 이스라엘 로켓포를 발사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이스라엘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공습을 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서는 12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팔레스타인에서는 232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 수만 놓고 본다면 20배의 불균형 현상이 나타났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1000여 명의 일본군이 사망하자 분노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일으켜서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공격하여 적게 잡아도 1만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처럼 폭력에 의한 소극적 평화의 추구는 불균형한 폭력행사로 이어진다. 불균형한 폭력은 일시적으로는 저항 의지를 억누를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고 힘있는 자가 행사한 폭력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한다. 그 결과 새로운 저항과 폭력이 이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평화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해관계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 나아가 인간 속에는 자신의 생명과 이익을 위해 평화를 깨뜨리는 죄성이 가득 차 있다. 현재의 기득권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패권주의가 가득하다. 더 나가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개개인의 차원에서는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적 · 국가적 차원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비도덕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힘이 있는 국가는 자신들의 권익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힘없는 자를 폭력으로 압제하는 소극적 평화를 선호한다. 힘이 없는 사람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권리와 이익을 되찾기 위해서 폭력으로 저항한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성도들은 적극적 평화를 힘써 추구해야 한다. 적극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약자의 생명과 생존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약자의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살기 위한 약자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고, 그에 대항하여 폭력을 통한 소극적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강자의 압제 또한 계속될 것이다. 적극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약자의 생존권에 더하여 자주와 복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약자의 자주와 복지를 위해서는 강자의 욕망이 제어되어야 한다. 패권주의란 강자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저항을 폭력으로 억압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국가 정책이다. 요즈음 많이 논의되는 그레이엄 엘리슨의 '예정된 전쟁 :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서 나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미중 양국이 패권주의를 절제하지 못하여 생겨난 위기이다. 강한자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약한자의 생존, 자주, 복지를 보장해 주지 않는 한 소극적 평화는 가능해도 적극적 평화는 불가능하다. 폭력에 의한 소극적 평화 역시 늘 불안한 평화일 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다. 욕망을 절제하고 가진 것을 내려 놓고 약한 자의 생존, 자주, 복지를 도와주는 것이 평화의 길이다. 약한 자 역시 자신의 생존, 자주,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고 수고하고 애써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노치준 목사 (유클레시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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