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쟁의 포성이 멈추지 않는가?

왜 전쟁의 포성이 멈추지 않는가?

[ 6월특집 ] 평화의 길, 멀고 험한 길인가 1

황홍렬 교수
2021년 06월 02일(수) 21:46
간디가 손자와 더불어 18개월을 지낸 적이 있었다. 간디는 손자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날 일어난 일을 돌아보면서 나무의 한쪽 가지에 육체적 폭력의 열매를, 다른 가지에는 정신적 폭력의 열매를 그리게 했다. 두 달 만에 손자의 방은 정신적 폭력의 열매로 뒤덮였다. 간디는 이를 통해 손자에게 정신적 폭력이 육체적 폭력보다 훨씬 더 해롭고 간악함과, 육체적 폭력의 연료가 되는 정신적 폭력을 멈추지 않고는 육체적 폭력이 멈출 수 없음을 가르쳤다. 2012년 한국의 대도시에서 중학생들이 연이어 자살하면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 지역교육청은 종교계에 학교폭력에 대응할 자문을 구했다. 그렇지만 개신교만 응답하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폭력에, 구체적으로 학교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평화교육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학교가 평화교육을 실시한 적이 있는가? 이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콜먼 맥카시는 워싱턴 D.C에 있는 '담장 없는 학교'에서 글쓰기 교육 후 "다음 수업 제목을 무엇이라 할까요?"라는 질문에 그도 모르게 평화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교육을 되돌아보니 평생 평화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20년간 소년원으로부터 명문대학에서 진행한 평화교육을 '19년간의 평화교육'에서 소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왜 평화교육을 실시하지 않는가? 이는 한국교회가 신구약 성경에서 평화의 중요성 또는 평화가 신앙생활과 신학에서 지닌 중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샬롬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평화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 평화(에이레네)의 세 차원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이루셨다. 인간의 죄를 십자가 보혈로 사하신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무셨고(엡2:14),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셨다(골1:20).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성령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롬14:17)이다. 메시야가 이 땅에 임할 때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시85:10)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5:9)고 하셨다. 그런데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이레네 포이오스)은 로마 제국의 주화에 황제의 흉상과 함께 새겨진 글이다. 로마제국에서 황제의 특권인 평화를 이루는 일을 예수님은 제자들과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의 사역이라 선포하셨다. 십자가로 이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전쟁으로 왕국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가고 조공을 바치게 하는 로마의 평화와 대립된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어부, 열혈당원, 세리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이뤄가는 일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함에 하나가 되어갔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공산당원 안재선을 용서해달라 청하고 그를 양자삼았지만 한국전쟁 초기에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삶을 기리는 한국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의 보루가 된 것은 모순이다. 손양원 목사는 예수님 말씀대로 원수사랑을 실천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공산당으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경험에 종속될 수 없다. 1990년대 북한이 수해와 가뭄과 홍수로 기아에 허덕일 때 북한에 식량을 보내면 그 식량이 군인들에게 보내져서 남한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면서 북한에 식량 보내는 것을 '퍼주기'로 비난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였다. 베트남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사진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불타는 트랭 방 마을에서 벌거벗고 뛰쳐나오는 한 소녀가 있었다. 판티 킴푹은 수십 번의 수술과 고통으로 자살을 생각했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회심을 했다. 그녀가 1996년 미국 재향군인의 날 행사에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미래의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 글레 스타센을 비롯한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산상수훈과 로마서 12장에 기반한 전환의 주도권을 통해 서독과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철거하는데 기여했다.

한국 초대교회가 적은 교인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 것은 교회 안에서 양반과 백정이 하나되는 놀라운 새 역사를, 새 세상을 부분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3·1운동 당시에 민족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일제에 가장 큰 핍박을 받았지만 이후에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니라 민족의 종교로 여겨지고 교회가 성장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미군정의 선교사를 통한 적산가옥 등 이권에 연루되면서,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는 미군 구호물자 등 이권에 연루되고, 교회가 분열하고, 교회성장주의를 통해 십자가와 멀어지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살지 못했다. 이제 한국교회가 십자가 지는 교회로 회심하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고 선포하는 교회로 거듭나도록, 화목의 직책을 감당하는 치유와 화해의 공동체로 거듭 나도록, 하나님 말씀이 회복되어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세상의 소금과 빛된 교회로 거듭 나도록 함께 기도하자.

황홍렬 교수(부산장신대, 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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