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생명밥상

그리스도인의 생명밥상

[ 현장칼럼 ]

김신영 박사
2021년 05월 18일(화) 08:20
성경에는 음식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가운데 다니엘서 1장 8절은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말한다. 다니엘이 왕의 식탁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왕의 식탁에는 율법이 금지하는 돼지고기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은 왕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혹자는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적의 호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느 해석이 가장 옳은 것인지를 떠나 이러한 해석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다니엘의 거부는 왕의 식탁을 구성하고 있는 음식이나 포도주 그 자체가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제공된 음식과 포도주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종교적 배경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식 개명은 받아들였지만 왕의 음식은 거부했다.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곧 바벨론의 권력과 풍요로움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의존을 수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왕의 음식에 참여하는 것은 바벨론의 풍요와 번영을 구성하는 정신적, 물질적 토대와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를 거부한 것이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음식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의미였다.

이제 시선을 우리의 밥상으로 옮겨보자. 우리는 밥상에서 영양소 외에 어떤 맥락을 읽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주 적용하는 신앙의 기준이 유독 밥상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밥상을 그저 감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음식의 사회적 맥락을 신앙적으로 고민했다. 우리도 다니엘과 같은 렌즈를 가지고 식탁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먹는 농수산물들이 과연 '살림'의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왔는지 아니면 '죽음'의 경로를 따라 우리에게 왔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땅과 바다가 죽어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식탁에 오르는 육류와 어류에 직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누리는 다채로운 식탁은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땅과 바다를 황폐하게 만드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우리가 잘 먹을수록 땅과 바다는 죽어간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밥상은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땅과 바다를 죽이는 밥상은 땅과 바다뿐 아니라 거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과 생명들마저도 위태롭게 만들며, 그런 밥상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자본의 비정상적인 논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지탱하게 된다.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의 학문과 개명은 받아들였지만 왕의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지켰다. 왕의 호의로 제공된 음식의 이면에 있는 탐욕과 폭력과 불의의 맥락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밥상에 놓인 농수산물들과 고기와 음료들이 누군가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가공되는 과정을 거쳐 우리 앞에 놓였다면 우리는 이 음식에 대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불편함을 직면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생명밥상을 완전히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의 먹거리 문화가 죽음과 희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생명에 관심을 둔 교회들이 '생명밥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생명'은 그저 유기농 먹거리, 지역 생산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밥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불어넣어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생태계와 공생하는 매우 진취적인 신앙적 실천을 추구하는 데에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



김신영 박사 / 생태인문학자·살림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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