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학 재정립

고통의 신학 재정립

[ 기고 ]

최갑도 목사
2021년 03월 22일(월) 14:42
"우리의 수명은 칠십 년, 힘이 있으면 팔십 년이지만 인생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아가듯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라는 시편 90장 10절 말씀처럼 우리 삶의 여정은 슬픔과 고통이 따르는 길이며, 누구에게라도 예외가 없는 길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험로(險路)를 걸어오며 머지않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또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될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생각의 재정립일 것이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진다. 그러나 때론 상황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더 나약해지고 비참해져 버리기도 한다. 당연한 질문일 수 있으나,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고통을 겪을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통해 더욱 성숙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통이 나를 비참한 수렁 속으로 점점 빠져들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사실 고통을 바라보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시련이 닥치면 우리는 어김없이 "왜?", "어째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이 고통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생각되기에 던지는 물음이다. 이러한 질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까(욥 3:20)" 도대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길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왜 나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를 외치는 것일까?

고통의 원인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이 죄를 지어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 즉, 전통적 고통관이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 저주를 받을 것이다(창 3:17~19)"라고 말씀하셨다. 이 고통은 개인 처벌 원칙에 입각한 고통관이다. 그러나 이 전통적 고통관이 늘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현재의 고통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여 자기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사랑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고통을 받는 것이 조상들의 죄 때문이거나 벌을 받거나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집단 처벌적 고통이다. 사실 원죄 이야기는 조상 탓으로 우리가 벌 받고 있음을 일러 준다. 아간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다른 많은 병사들이 죽어야 했다는 여호수아 7장 12~25절의 말씀처럼 말이다. 셋째는 고통이 원인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요 9:2)"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 9:3)"라고 말씀하신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설득력 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운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기에 고통은 신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신앙인에게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주어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이들 마다 채찍질하신다. 징계를 받을 때 참아내어라,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신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겠는가(히 12:6~7)"라고 말하며 고통의 의미를 알려 준다. 고통은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를 시험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다섯째는 대속적 고통관으로 분류된다. 형들의 질투를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된 요셉이 가뭄을 피해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났을 때 한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이곳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서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창 45:7)"였다. 고통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섭리의 도구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인간의 선을 위한 대속적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다(벧전 2:24).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대속적 고통은 지금도 우리 신앙인들의 걸음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고통의 문제를 인간의 실존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은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줄 뿐 아니라, 극심한 고통 중일지라도 평화를 찾을 수 있게 이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부하신다. "누가 내 뒤를 따라서 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눅 9:23)." 십자가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고 가라, 고통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가지 말고 맞서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충만한 삶은 충만한 고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사도 바울은 고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나는….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신앙관 때문이다. 둘째, "얼마나 더 오래도록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자신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는 진리를 인정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아픔을 가볍게 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것이다. 나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을 찾고, 고통받는 세상을 위하여 크든 작든 사랑을 나누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고통 중에서도 내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며 그분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빅토르 에밀 프랑클(Viktor Emil Frankl)은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기에 현재 닥친 삶의 변화와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위험에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 28:20)."

최갑도 목사 / 성내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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