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만남/ 예수님의 뒤를따른 사랑의사도 황광은목사와 김창걸장로

아름다운만남/ 예수님의 뒤를따른 사랑의사도 황광은목사와 김창걸장로

[ 교단 ]

기독공보
2000년 06월 10일(토) 00:00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사람을 오늘 이 시점에 다시 들추어 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문지상이나 방송에서 죽은 사람을 다시 조명할 때는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 무슨 무슨 기념일이나 시대적인 상황이 그 인물을 재조명하거나 새롭게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거나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등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에게나 교인들에게도 한경직목사 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지도 못하고 세상이 주목할 만한 큰 업적을 남기지도 않은 고 황광은목사를 오늘 이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의 한국보육원에서 황광은목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먼저 간 그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우리 시대 최고의 목회자'로 기억하고 있는 김창걸장로(숭실학원 이사장·영암교회)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다 간, 마치 예수님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목회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젊은 목회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생활 속에서 신앙의 본을 보여준 사람, 한마디로 현대 목회자의 사표라 할 만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와 난지도의 `보이스타운'에서 두 차례 황광은 선생을 만나고 그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간직한 김창걸장로는 1960년 대광중고등학교에서 황광은 목사를 만난다. 김장로가 대광학원 교무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 황목사가 교목으로 부임한 것.
김장로는 “성공적으로 교목의 임무를 다하고 학교를 떠나는 이를 별로 많이 보지 못했을 정도로, 교목처럼 힘든 직종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이 빚어낸 결과가 대부분이지만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학원의 경영자 모두에게 만족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학원 경영자에게 관심을 쏟게 되면 교직원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학생의 신망을 받으면 교직원으로부터는 인정을 받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렇다고 교직원만을 위해서 교목활동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장로는 황광은목사를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높았고 존경을 받았으며, 역대 대광학교 교목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교목으로 인정받았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황 목사는 학생들과 함께 사는 교목이었습니다. 학생들의 고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었고,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해주는 자애로운 교목이었죠. 교목실은 언제나 붐볐습니다”. 학교에서 황목사를 지켜본 김장로가 기억하는 교목실의 풍경이다.
대광학원에서 세번째로 만난 김장로와 황목사의 인연은 영암교회(서정호목사 시무)가 황광은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영암교회 초대 목회자 김지석목사가 떠난 뒤 김장로는 교목에게 영암교회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 영암교회를 맡아주십시오. 그러나 영암교회만을 위해 일해달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만 영암교회를 위해 일해주시고 나머지 반은 다른 활동을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영암교회에다 더해 주십시오”.
사회사업가, 고아의 아버지, 소년단 간사장, YMCA 간사 등 황목사에게 따라 붙는 다채로운 별명에 따른 영암교회의 배려였던 것. 김창걸장로는 이 부분에서 “목사님은 대광학원이나 영암교회 만의 황광은이 아니고 한국 교회와 사회의 황광은이었기 때문”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광학교에 이어 숭실학교에 부임해 `오늘의 숭실'이 있도록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김창걸장로, 단 1년간 대광의 교목으로 있었을 뿐인 황광은목사와의 인연으로 오늘도 그를 생각한다. 때로 참다운 목회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유달리 사랑했던 선생님의 모습으로, 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설교가의 모습으로...
오는 7월 16일 오후 3시 영암교회에서는 황광은목사 30주기 추모예배가 마련된다. 30년이 지나 황광은목사를 아는 이들은 모두 `원로'가 됐지만, 그가 보여준 목회자의 참 모습을 오늘의 젊은 세대에 바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한 데 모아진 것. 황목사를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김장로의 역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다.
영암교회(준비위원장:김구룡)와 대광학교 동창회(준비위원장:백도웅) 등이 서로 협력해 미국에 있는 10여 명의 유족을 초청하고 `황광은 목사 이야기, 사랑을 받느니보다는 사랑을 주게 하소서' 등의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등 추모예배 준비가 한창이다. 김장로는 이번 추모예배가 계기가 되어 황목사의 대광 제자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얘기도 접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자리에 연연하는 오늘날의 목회자들과 세속화로 치닫는 오늘의 한국 교회. `오직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기를 원했다'는 황광은목사가 이 시대의 한국 교회에 있다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궁금함에 조급증마저 갖게 됐다. 조급증을 숨기지 않는 기자를 두고 김장로는 이런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가장 밑바닥의 인생들과 함께 일한 분이었지요. 인간 황광은, `인간'은 그 어느 수식어보다 그에게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박성흠 jobin@kidokongbo.com

◈ 인간 황광은

“언제나 먹는 그 밥을 또 다시 먹어야 하겠지만 내가 이 땅에 이 겨레에 무엇을 남기고 가겠는가. 신앙의 유산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고 황광은목사의 유고 중 요한복음 6장 10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인간 최대의 유산'을 주제로 한 설교의 마지막 부분인데, 그를 얘기할 때마다 따라 붙는 수많은 수식어를 요약해 놓은 듯하다.
경춘선의 한가한 역 경기도 양주군 퇴계원에 묻힌 황광은목사의 일대기 `사랑을 받느니 보다 사랑을 주게 하소서'를 읽는 동안 `그에게 붙은 수식어도 참 많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랑의 사도” 또는 “화해의 사도”라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단어에서 “인간의 밑바닥에서 사는 청소년들의 형” 등 좀더 구체적인 형용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목회자였지만 웅변가, 아동문학가, YMCA간사, 기독교교육협회 간사, 난지도 `소년시'의 시장 등 수많은 직함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30년 전에 이 땅을 떠난 황광은목사를 두고 부르는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도 가장 감동있게 들린 말은 그러나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말이 앞서지 않고 생활 속에서 신앙을 보여준 사람”이라는 그의 지인(知人)의 설명이다. 이 지인은 또 “한경직목사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우리 시대 목회자상의 표본이 될 만한 인물”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1923년 평북 용천에서 3대째 기독교 가정을 지켜온 황도성장로의 차남으로 태어난 황광은목사는 한마디로는 잘 설명이 안된다.
한신대학교 시절에는 연극반에서 `에스더'의 `하만'역으로 열연을 했으며, 성극의 각본을 쓰고 주연에 연출까지 하고 `황광은 동화집'을 펴 낼 정도로 문학적 예술적인 기질이 농후했던 목회자. YMCA의 간사로 `거리의 아이들'을 모아 소년시를 건설하고 운영한 `고아들의 형'. 크리스찬신문을 비롯해 새벗 등 기독교 언론의 창달에도 앞장서온 언론인. 그래도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의 길지 않은 생애 중에서 짧은 1년여 기간 동안 황목사가 몸담았던 대광중고등학교에서는 그의 또다른 모습을 본다. 1960년 대광학교에 교목으로 부임한 그해에는 4·19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대학교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광학교의 젊고도 혈기 왕성한 학생들 그리고 정문을 막고 선 정사복의 경관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숨막히는 당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겠다.
4·19 혁명의 데모 군중에 합세하기 위해 교문을 떠나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황목사는 울며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가거라, 조국을 위해. 차라리 죽어도 불의를 고발하라” 기도하던 목사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학생들도, 숨죽여 지켜보던 교직원과 학부모들 모두가 울음바다가 됐다. 교직원들이 앞장을 섰고 질서 정연하게 교문 밖으로 나가는 학생들의 기세에 눌려 경찰들은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황목사의 기도를 받았던 최완택목사(민들레교회)는 황목사가 “하나님 이 어린 양들이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조국의 기막힌 현실을 굽어 살피소서. 순수한 열기로 뛰쳐나가는 이 어린 양무리를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황목사는 또 졸업반 학생들의 수양회에서 발을 씻어준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장난으로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황목사의 진지함에 놀라 조용해졌다. 그는 발을 씻긴 후 “생의 목표를 정하라”고 말했고 학생들은 황목사가 나간 뒤 기도를 했다. “주여 내 민족의 발을 씻게 하소서”
그 때의 그 제자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단 1년간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 그의 뜻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30주기 추모 예배를 준비하고 기념사업회를 재가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1970년 7월15일 파란만장한 48세의 생애를 마감한 그는 그 흔한 `장'자리 하나 하지 않은 채 가난하게 떠났다. “아무리 에누리를 해도 그동안 배우고 체험한 바를 펴야 할 그런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글을 깨치기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설교자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의 소설에 감명을 받았다던 황목사는 그의 뜻이 만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기념하는 수많은 그의 후배들이, 제자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목사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의 정신을 생각합니다”고 고백하며 그가 그랬듯이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황광은 목사 연보

1923년 2월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지북동25번지 황도성장로 김도순권사의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
1929년 양시공립보통학교 입학. 성 프란시스와 가가와 도요히코(賀川票孝)의 사상적 신앙적 영향을 많이 받음
1939년 단신 서울상경. 향린원(고아원)에 몸을 담고 9년간 생활. 한영고등학교 수학.
1945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전신) 입학. 1948년 졸업
1947년 서울중앙YMCA간사로 1955년까지 재직
1951년 난지도 한국보이스타운 건설
1952년 김유선과 결혼
1955년 새문안교회 부목사. 1960년까지.
1960년 대광중고등학교 교목
1961년 영암교회 담임
1961년 미국보이스타운 간사 학교 수학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 총무
1966년 기독교교육협회 간사
1970년 7월15일 소천

◈ 故 황광은목사 30주기 추모예배

7월 16일 오후 3시 영암교회서 고 황광은목사 30주기 추모예배가 오는 7월16일 주일 오후 3시 영암교회(서정호목사)에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족을 비롯해 영암교회 교인과 황목사의 제자 등 관계자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다.
1961년부터 1970년 7월15일 소천할 때까지 영암교회에서 시무한 황목사의 당시 지인들, 이도명 이창린 김국보 원로장로를 비롯해 김삼열 심상훈장로(이상 영암교회) 김희보(전 본보 편집국장) 최완택목사(민들레교회) 이반교수(숭실대), 전택부장로(YMCA) 등 생전의 황 목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영암교회 황광은목사 추모행사 준비위원장에는 김구룡장로가, 대광중고등학교측 준비위원장에는 백도웅목사(교회협 부총무)가 각각 협력하고 있으며, 이번 추모예배를 계기로 황광은목사 기념사업회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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