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살고, 말씀 따라 죽어지이다!"

"말씀으로 살고, 말씀 따라 죽어지이다!"

[ 흔적을찾아서 ] 17. '말씀의 벽' 세우는 서도인 박재현 집사

고무송 목사
2020년 06월 12일(금) 11:20
말씀의 벽을 세우고 기쁨을 나누는 이길주목사, 박재현집사, 고무송목사(오른쪽부터).
-추신:원고마감 시각, 필자에게 전해진 이길주 목사의 긴급메시지 - "고 목사님, 기쁜 소식 전해드립니다. 저희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카페교회 처소가 마련됐습니다. 엘리야에게 보내셨던 까마귀(왕상 17:8~24)를 저희에게도 보내주셨습니다. 믿고, 구하고, 소망했던 것보다 더욱 더 넘치는 예배처소를 거저 주셨답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무슨 얘긴가? 찬찬히 정리, 다음에 전해드리겠습니다. - 필자 드림

독자 여러분, 혹여 기억하시나요? 3월 21일자 본란에 소개된 '텐트메이커 사역자', '홍매화 같은 그 사람' 타이틀과 더불어 역사 무대에 등장했던, 준비된 사역자 이길주 목사. 그와 그의 가족들이, 그리고 그가 부목사로 섬겼던 일산충신교회 교인들은 물론 강호제현들이 기대하며 기도했던 카페교회. 그 처소가 '거저' 마련됐다는 기쁜소식! 이제, 독자들에게 찬찬히 알려드릴 시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습니다. 참포도나무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더불어섬'이라는 공간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일반적 교회 형태 아닌, 누구라도 편하게 와서 쉬어갈 수 있는, 대화와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카페같은 공간으로 가꾸려 합니다. 염려와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무궁화로37 노블리제빌딩 406호 '더불어섬'. 일산신도시의 '대학로' 또는 '홍대앞'이라 일컬어지는 '라페스타'(La Festa).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길목, 바로 그 십자로(十字路)에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길목교회'가 마침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름 밝히시기를 원치 않으시는 감리교 목사님. 그분께서 몇 해 전 이 자리에서 교회를 개척, 성장과 함께 이전하심으로써, 저희들에게 선뜻 내어주신 선물입니다. 엄청난 은혜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벽'을 세우다

-이 어찌 기적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이 목사님께서 그토록 간구했던 이 엄청난 하나님의 제단에 저의 작은 정성이나마 헌납코자 붓 한자루 들고 달려왔습니다.

말씀서예가 박재현 집사(하이기쁨교회).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필, 이른바 국필(國筆)이라 불리는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 문하에서 사사, 국전 서예부문 대상을 비롯, 2000년 중국 정부 주최 국제서법대전 수상, 현재 북경예술원 정회원, 대한민국 국전 서예부문 심사위원 등으로 국내외에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서도대가(書道大家). 그가 말씀에 천착(穿鑿), '말씀의 벽'을 세우는 일에 발군(拔群)의 예술혼(藝術魂)을 뜨거운 신앙의열기로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성서한국(聖書韓國)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농어촌 자립대상교회에 세워진 말씀의 벽, 보여지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목격합니다. "말씀으로 살아난 인생, 말씀을 쓰다 죽어지이다!"- 내 평생 100개 교회에 말씀의 벽을 세우고자 합니다.

강원도 화천 부촌교회를 시작으로 전북 김제 월성교회, 경기도 양주 동행교회 등 전국 농어촌교회를 찾아다니며 이 작업을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박재현. 물론 자비량이다. 길목교회는 41번째라 했다. 요한복음 14장 1~31절까지 본문 전체 총 1384자를 가로 6, 세로 2.5m, 55줄(줄당 26자, 글자 크기 9cm) 내리닫이 종서(縱書)로 썼으며, 마지막 작가의 글로 마감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세상과 교회를 이어줄 길목교회의 초석으로 삼고 여기에 새기옵니다. 이천이십년오월이일 소금.

'소금'은 박재현의 아호(雅號). 하루 8시간, 꼬박 사흘 동안 예술혼을 사르는 현장을 감격으로 지켜봤다. 영육혼(靈肉魂) 삼위일체(三位一體) 강행군! 감탄불금(感歎不禁) 장관(壯觀)이여! 저 예술혼의 뿌리는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그 심오한 '흔적을 찾아서' 필자는 이길주 목사와 함께 일산명품 '빵굽는작은마을' 애플파이 한 상자 받쳐들고, 서도인(書道人)의 공방(工房)을 찾았다. '가나새암' 옥호(屋號)가 내걸린 작업실은 차라리 갤러리(Gallery), 온갖 진귀한 보화로 충만했다.

-통상적으로 현장취재에서 그치건만, 고 목사님께선 '흔적을 찾아서' 누추한 작업실까지 찾아주시니 영광입니다. 평소 얼버무렸던 부끄러운 저의 인생고백, 오늘은 진솔하게 토해낼 수밖에 없겠습니다.

#생일 모르는 불우한 어린시절

-저는 땅끝마을 전라도 해남 출신, 올해 쉰다섯살, 1965년 1월 13일생으로 된 주민등록증을 갖고 삽니다. 이게 온통 가짭니다. 정확한 생일을 모릅니다. 나이도 모릅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가출했고, 엄마는 핏덩이를 버려둔채 행방을 감춰버렸답니다. 조부모님께서 거둬주셨으니, 조손(祖孫) 가정이죠. 그걸 아버지의 방랑벽(放浪癖)이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얼버무렸습니다만, 실은 군입대(軍入隊) 기피행각(忌避行脚)이었기에, 치욕스러워 쉬쉬 숨죽이며 살아온 부끄러운 인생이랍니다.

감히 필설로 옮기기엔 두려운 양심선언(良心宣言)이요, 어쩌면 신앙고백(信仰告白) 아니겠는가.

-할아버지께서 서당 훈장님이셨고, 시(詩), 서, (書), 화(畵), 가(歌), 무(舞)에 통달하셨던 분으로, 학교 공부를 금하고 천자문(千字文)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깨우치도록 다그쳤으며, 먹물 찍어 낙서하며 서화(書畵)를, 가야금 튕기며 남도창(南道唱)을 배우며 쑥대머리를 노래했고, 고려청자에 이조백자를 구워내야 했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오묘하신 섭리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필자가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과 사장 재직시절(1996~2005), 그리고 은퇴 이후 쭈욱 박재현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조병호 목사(한시미션)를 줄곧 조용히 수행, 자신의 위치를 성실함으로 지켜드리는, 무척이나 다소곳한, 어쩌면 수도사(修道士) 같은 모습을 견지했다.

-저도 고 목사님께서 한시미션을 아끼셨고, 지리산 전도봉사활동까지 동행하셨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필자가 박재현을 특별히 주목케 된 것은, 그가 한국기독공보사 회의실 벽에 간행사(刊行辭)를 쓴 필력(筆力)! 추사(秋史)의 삶과 예술에 탐닉했던 필자로선 박재현의 글씨는 경이로움이었다. 그의 필체는 왕희지(王羲之)의 평사낙안(平沙落雁) 아닌 추사의 세한도(歲寒圖) 마냥 쓸쓸함이 배어났다. 필자는 그의 예술세계, 그의 삶이 퍽 궁금했다. 그런 그가 일산에 출현, 길목교회에 말씀의 벽을 세운다는 소식이니, 이 아니 반가울손가. 꼬박 작업을 지켜봤고, 이렇게 공방까지 찾게된 것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석학 토인비 교수(Prof. A.J.Toynbee, 1889~1975)가 갈파한 도전(挑戰)에 대한 응전(應戰)으로 인류문명사가 진보한다는 논리(Challenge and Response)에 부합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

-그날이 아마 성탄절 전날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옆집 꼬마 친구가 교회엘 가재요. 사탕이랑 과자랑 선물도 주고 재미있는 노래랑 연극도 하니까, 오늘밤엔 꼭 좀 같이 교회엘 가자고 조르는 거에요.

땅끝마을엔 동네마다 교회가 있었다고 했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과 헌신(獻身)과 순교(殉敎)의 열매다. 그러나 재현이는 교회 마당에도 얼씬거릴 수 없었다. 오대조(五代祖) 제사(祭祀)를 모시는, 철저한 유학신봉자 할아버지의 엄명이 지엄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하얀 모자를 쓴 서양 선교사님들의 자동차가 뽀얀 흙먼지 흩날리며 나타나는 날엔, 온 동네사람들의 구경거리였습니다. 허지만, 예배당엘 가면 서양귀신이 잡아먹는다고 할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무서워서 교회 근처엔 얼씬도 못했어요. 그러나 그날밤엔 친구 영희(英姬) 따라 교회엘 갔더랬습니다. 영희는 이름 그대로 '꽃처럼 예쁜 계집애'였고, 절 구원의 문으로 인도한 천사였습니다.

영희는 재현에게 작은 책을 성탄선물로 안겨주었다. 난생 처음 받은 선물이었다. '가보 1호'로 고이 간직하고 있는 성경책! 밤낮 탐독했다. 신기하고도 놀라운 책이었다. '주기도문'에 '필'이 꽂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아버지!" -한번도 맘 놓고 불러보지 못했던 이름! 아니, 부르고 싶지도 않았던 이름! 박재현은 영희가 선물로 안겨준 작은 성경 속에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케 된다. 영혼(靈魂)의 개안(開眼)이었다.

-아니, 밉고도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버지! 그런데 천지만물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니! 성경 속에서 찾아낸 위대한 진리 -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요, 나를 돌보신다!"

#말씀과의 만남

1990년대 초, 군복무를 마친 박재현은 갈 곳이 없었다. 고향은 타향이었다. 뉘라서 고향을 그리움이라 했던가. 작가 이어령이 갈파하지 않았던가 - "고향은 나로 하여금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영희마저 시집을 가버렸다 하지 않던가. '서울은 만원이다' 이호철의 소설이 회자되던 시절, 강남 개발로 우후죽순처럼 올라가는 아파트 건설 현장엔 막노동 일꾼이 필요했다. 그는 개포동 언저리에 둥지를 틀었고, 이웃 성지교회(이용일 목사)를 찾아 들었다. 그의 품속엔 영희가 준 작은 성경책이, 그리고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붓 한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때 청년부 지도 전도사님께서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말씀을 집중적으로 강론, 저는 말씀의 바다에 풍덩 빠져들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나의 삶까지 따사롭고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조병호 목사였다. 그와의 만남은 곧 말씀과의 만남이었다. 조 목사가 추구하는 말씀사역에 동참, '한시미션', '숲과나무', '땅에 쓰신 글씨', '통독원' 그리고 '하이기쁨교회'까지.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조 목사의 발걸음을 조용히 따랐다. 조 목사는 그의 은사(恩賜/Gift)를 귀히 여겨준 은사(恩師/Mentor)였다. 무언의 가르침 속에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성경 39권을 몽땅 붓글씨로 새겼고, 신약성경을 쓰고 있으며, 농어촌 교회를 찾아 '말씀의 벽'을 세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조 목사님의 말씀 사역에 동참한 많은 젊은이들 속에서 이길주 목사님을 만났고, 그의 신앙인격과 특별한 은사 속에서 한국교회의 내일에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한국(聖書韓國) 입니다.

필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 탄생하는 '길목교회' 그리고 '말씀의 벽' 세워짐을 하나의 사건(事件)으로 인지(認知)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지양(止揚; Aufheben)하고 지향(志向; Intention)해야 할 바를 제시하시는 하나의 소중한 지표(指標/Indication) 아니겠는가? 나름 나의 지극히 절박한 소원을 마음 속 깊이 깊이 여미면서, 조용히 두손을 모으게 되는 것이다.

-주여, 새롭게 닻을 올리는 귀한 제단과 주의 종들의 항해(航海), 순풍(順風)으로 인도하옵소서!

글·사진 고무송 목사(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전 본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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