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공보 사역은 선교입니다"

"한국기독공보 사역은 선교입니다"

[ 창간기획 ] 창간에 만난 사람 김주열 장로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9년 01월 08일(화) 15:47
올해 창간 73주년을 맞는 한국기독공보는 한국교회 역사에 많은 기록들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본보는 미국에 해외 지사를 운영하며 국내외의 소식을 한인교회에 전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본보는 창간 73주년을 맞아 해외 첫 미주지사를 운영하며 지사장을 맡았던 김주열 장로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국기독공보 역사상 처음 미주 지사장으로 파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데다가 아는 사람도 없어 무척 두려웠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이 주셨던 잠언 30장 7∼9절 말씀을 붙잡고 어려움을 이겨내습니다. 처음 6개월은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냈습니다. 그 때, 박희소 목사와 곽근상 장로, 김계용 목사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최근 고국을 방문하던 중에 본사를 찾은 김주열 장로는 처음 미주 지사장으로 판견돼 지사를 개척하던 시절을 회고하며 후배들에게 선교 사명에 대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혼자 기사 쓰고, 편집하며 배달까지 1인 3역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초기 어려웠던 시절을 소개한 김주열 장로는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물론 나중에는 기자와 편집기자, 여직원 등 4명이 함께 일을 했다. 그러나 미주지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광고였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김 장로는 "한국과 광고비를 비교했을 때, 미국은 절반 가격도 못 받았다"며 "결국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지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사를 포기한 이유를 언급했다. 이후에 미주 한국기독공보는 당시 미주한인장로회 총회(현 해외한인장로회 총회)에서 운영하다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노회에 맡겼지만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김 장로가 본보 공무국에 입사한 시기는 1973년. 당시 사장 최창근 장로, 편집국장 고환규 목사, 그리고 4면 발행에 가끔씩 8면을 발행한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한국기독공보가 첫 주간신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말한 그는 "고환규 목사가 정부 비판을 많이 했고 고문을 많이 당했다"면서 "고문으로 목발을 짚고 다녀야될 정도로 힘들게 신문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당시에는 사회적인 현실이 마음대로 신문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윤전기 돌리는데 종로경찰서 정보국에서 4~5명이 나와 검열을 했고 지우라고 지시하기도 했지요. 그 때 신문을 보면 지운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지운다고 지웠지만 일부 그대로 나오면 신문을 태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면 난지도에 가서 신문을 태우기도 했는데 그런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요"

그는 힘들고 열악했던 당시의 신문 제작 과정도 빼놓아지 않았다. "납활자로 식자를 뽑아 조판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불이 어두운 지하에서 몇 년간 교열을보다보니 교열을 보고 또 봐도 오자 탈자가 나오고 시력까지 나빠졌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본보주필이었던 김형태 목사의 도움으로 조선일보에서 인쇄했지만 제작비를 제때에 지불하지 못해 긴급하게 수금한 광고비를 지급하고 신문을 찾아오던 때도 있었다고. 심지어 재정이 열악해 월급 때에 비상근이었던 최창근 사장의 회사 앞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으면 "월급때가 됐구먼"하고 사재를 털어 한국기독공보를 유지해 나갔다고도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락교회에서 독자 확보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고 이후에 여전도회를 통해 군부대에 신문보내는 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한국기독공보와 미주 지사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을 회상한 그는 후배들에게 문서선교사로서의 소명감을 갖고 일해 줄 것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기독공보의 사역은 선교입니다. 직원들은 선교사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인내하고 주어진 일에는 성실히 충성해야 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풀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함께 웃을 수 있고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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