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1월 5일

12월 31일~1월 5일

[ 가정예배 ]

2018년 12월 31일(월) 16:24
월-새해를 여는 기도
본문: 시 143:1~6
찬송가: 363장

다윗은 대적들의 핍박으로 힘겨운 날들을 보내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1절에서 '들으시며',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소서'라며 절박한 심정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 연말연시를 지내면서 다윗처럼 절박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기도로 새해를 준비하거나 맞이할 것이다.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까?
 
첫째, 다윗은 '옛날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다윗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신실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확신했다. 기도에는 반드시 지나온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회개와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들을 떠올려 보자.
 
둘째, 다윗은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기도했다. '읊조리다'는 말의 뜻은 '묵상하다, 중얼거리다'는 뜻이다. 다윗은 지금까지 직접 체험했던 많은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신 모든 일들을 묵상해보자. 기도는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더욱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셋째, 다윗은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생각하다'는 단어의 뜻은 '명상하다, 숙고하다, 이야기하다'이다. 즉, 지금도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명상하고 숙고하면서, 반복해서 말하고 또 선포하며 기도한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읊조리면서 동시에 현재 우리 삶을 이끄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을 마음껏 고백하고 선포하며 기도하자.
 
넷째, 다윗은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했다. 이 말씀은 기도하면서 손을 뻗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내 삶의 해결자이시고 보호자이심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이며, 절대 의존이다.
 
다섯째, 다윗은 '주를 사모하며' 기도했다. '사모함'은 '갈망함'을 의미한다. 다윗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기도의 응답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갈망할 때,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삶의 문제도 기꺼이 해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느냐는 응답여부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며', 주의 행적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시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해 절대 신뢰의 '손을 펴고', '주님을 사모'하는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기도로 새해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류시완 목사/포항창포교회

화-거룩함을 경험하라
본문: 사 6:1~5
찬송가: 264장

차를 타고 지나가다 문득 눈에 들어온 현수막을 하나 보았다. 그 해 교회의 핵심가치인 듯 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현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조차도 주저하지 않고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도 행복을 설교한다. '복음'을 가져다 놓아야 할 자리에 '행복'을 놓았다. 그러나 행복에 대해 집착하면 할수록 불행해진다. 교회는 결코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정녕 행복한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인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복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거룩'이다. C.S 루이스는 "거룩은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일단 그것을 만나면 결코 저항할 수 없다. 세계 인구 중 10%가 그것을 소유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접촉이다. '거룩'은 하나님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분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경험하지 않는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란 없다. 한국교회는 거룩을 말하지만 더 이상 거룩한 예배를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거룩을 경험할 수도 없다. 그분의 만져주심이 없다. 단지 거룩한 척 할 뿐이다. 그러니 진정한 회개가 없다. 회개를 불편해한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경험한다. 스랍들이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속에 '거룩'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예배는 들뜬 감정이 아니다. 행복한 감정이 아니다. 예배는 결코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경험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부정함을 토로하게 한다. 심령이 상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심령이 상했다는 의미는 상처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서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 즉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한다. 영혼까지 떨리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의 본성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 접촉하고 더 깊은 만남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변철 목사/삼보교회

수-주님처럼 만져주자
본문: 막 1:41~45
찬송가: 220장

본문은 마가복음에 나온 첫 기적 이야기다. 주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인데, 나병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병이면서도 불치병이었고, 또한 슬픈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은 물론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삶의 첫 번째 이유였던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나병환자를 가장 먼저 고쳐주셨다는 마가복음의 기록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주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시기에 앞서 하신 행동이다. 한 나병환자가 주님께 나아와 엎드려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즉시 세 가지로 반응하셨다. 첫째는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사…" 둘째는 행동이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렇게 행동하신 다음 셋째로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주님은 먼저 행동을 하시고 말씀을 하셨다. 말보다 행동이 빠르신 주님의 모습이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나병에 걸린 사람이 접촉하거나 나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한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단 접촉을 피하기 위해 격리시켰고, 접촉한 모든 것은 불살랐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말씀만으로도 이 사람을 고쳐주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이 일로 따르게 될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만져주셨다.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특히 '대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그에게 슬쩍 손을 댄 것이 아니다. 꽉 잡아주셨거나, 꼭 껴안아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강력한 사랑의 만져주심이 병으로 인해 무너지고 깨진 마음이 회복된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마음을 회복시킨 다음 몸의 병을 치료해주셨다. 그래서 말씀보다 먼저 만져주신 행동을 하신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자신의 삶에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감정적인 사랑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촉각(만져줌)이라고 했다. 청각, 시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 중에 촉각이 감각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으로 하실 수 있는 것도 일부러 손으로 만져주신 것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만져주심을 소원했던 것이다. 이 차가운 계절에 따뜻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처럼 서로 만져주자.
 
오늘의 기도
우리 또한 주님처럼 주님의 마음으로 만져주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양식 목사/기뻐하는교회

목-오직 은혜로만
본문: 잠 28:13, 행 31:9
찬송가: 542장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인 '돌과 두 여인'이란 책을 보면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일수록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깊은 죄악의 자리에 빠지게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두 여인이 스승 앞에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왔다. 스승은 두 여인에게 말하기를 현재 마음속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죄의 문제가 있으면 말하라고 한다. 한 여인은 젊었을 때 남편을 한 번 바꾼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큰 죄로 생각되어 지금도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다른 여자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지금까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아무 죄도 벌한 일이 없다며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때에 스승은 처음 여인에게 "신의 뜻을 따라 지시하는 것이니 지금 당장 밖에 나가 큰 돌 하나를 가져오되 가능한 한 네가 들 수 있는 큰 것으로 가져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여자에게는 "너는 가능한 작은 돌들을 가져오되 들 수 있을 만큼 많이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자루를 나누어 주었다.
 
두 여인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즉시 밖으로 나가서 큰 돌과 작은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 돌들을 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놓고 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큰 돌을 갖고 온 여인은 있던 그대로 그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으나 작은 돌을 한 자루 담아온 여인은 그대로 그 돌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어 다시 돌아왔다. 스승이 말했다. "죄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큰 죄는 언제나 기억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가 있지만 작은 죄는 속히 잊어 버리기에 자기는 죄가 없는 줄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기 때문에 더 큰 죄에 빠지게 된다."
 
본문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한다. 사도행전 31장 9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다. 하나님께 용서 받아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의 의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시간과 삶을 살아가는 청지기의 자세다. 우리가 주 앞에 드릴 '의'라는 것 역시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드릴 것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오늘의 기도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조차 주님의 은혜에서 시작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지욱 목사/부천상록수교회

금-하나님의 거룩
본문: 벧전 1:1~16
찬송가: 294장

2018년이 가고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여 살아가는 기준이 있다면 오늘 말씀 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구약성경 레위기는 거룩이 주제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아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많지 않다.
 
거룩을 우리는 어떤 외형적 모습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거룩은 구별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반어학사전에서는 거룩하다는 것을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말한다. 성스러운 것은 범상한 경지를 넘어 거룩한 고결한 것이고 위대하다는 것은 뛰어나고 훌륭함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거룩은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배우라고 한다. 오늘 우리는 새해 다짐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이 어떨까?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을 가장 간단히 표현한 것이 구별이다. 그러면 왜 구별한 것인가?라고 물으면 구별의 목적은 드림이다. 그래서 성구사전에서는 거룩을 헌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구별한 것이 거룩한 것이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지어다"라고 했다. 이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도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냥 성스럽고 위대한 분이라면 편할텐데 하나님도 무엇인가를 헌신하시면서 아니 주시면서 거룩하여지신 것인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이 있으신가? 많이 있겠지만 주님께서 구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니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말을 바꾸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내 전부를 준 것처럼 너도 나에게 너의 전부를 주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결국 주님의 거룩을 배우고,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내 전부를 구별하여 드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2019년 주님처럼 100% 주님만 사랑하는 성도가 되자! 주님이 우리를 100% 온전히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자! 그것이 주님처럼 거룩한 성도가 되는 길이다. 올 한해 주님을 사랑하되,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이 거룩하시듯이, 우리도 거룩해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주님께 전부를 드리며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요한 목사/괴산중부교회

토-평강이 넘치는 그리스도인
본문: 골 3:12~14
찬송가: 112장

골로새서 3장은 '위의 것을 찾으라'는 기본적인 삶의 원칙과 함께 구체적인 삶의 방향과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습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갈등, 분열, 반목으로 옛사람의 속성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첫째, 새 사람의 성품으로 옷 입어야 한다.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하였다(골3:12). 우리의 삶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성품으로 인해 발생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다. 가시가 돋친 나무와 같은 우리의 말은 서로를 찌르곤 한다. 더 인내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 일쑤다. 하지만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셨다. 긍휼과 자비가 넘치셨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인내하셨다. 주님 곁에는 많은 이들이 편안하게 안식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본받을 때,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서 평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서로의 잘못을 피차 용서해야 한다. 바울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였다(골3:13). 주님께서 영 죽을 죄인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우리 또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 주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마7:3). 하나님께서는 내가 남에게서 보는 모든 잘못을 내 속에서 다 들추어내실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할 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셋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한다(골3:14). 바울의 바람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사랑으로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교제하는 가운데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온전히 달성된다. 사랑은 믿음의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이며(갈5:6),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은혜이다(고전13:13). 우리의 신앙생활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주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할 때, 우리의 마음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할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평강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평강을 위해 새사람의 성품으로 살아가자. 분열과 갈등의 사회를 평강이 넘치는 사회로 갱신해 나가는 주역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복희 목사/만촌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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