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15일

12월 10~15일

[ 가정예배 ]

2018년 12월 10일(월) 09:55
월-은혜, 나를 보게 하는 것
본문: 고전 15:10, 딤전 1:15
찬송가: 280장

과부인 어머니의 희생과 뒷바라지로 유학을 다녀온 후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이 있었다. 교회를 떠났지만 어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오랜만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배를 드린 후였다. 삼삼오오 모인 성도들은 다른 이에 대해 험담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의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자신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심지어 교회 회의실에서는 크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했다.
 
화가 난 딸은 어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하루만에 교회에서 많이도 보았구나." 어머니의 말에 딸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보는 수준과 자기가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 큰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며 살아간다.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것이 보이는 법이다. 만약, 거짓이 보인다면, 내가 거짓 가까이 있는 것이다. 교만이 보인다면, 교만에 가까이 서 있는 것이다. 욕심이 보인다면 나에게 욕심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 옆으로 가면 섬김이 보인다. 기도의 사람 옆으로 가면 기도의 능력을 보게 된다.
 
누구와 무엇과 비교하는가에 따라서 영적 삶의 질이 결정된다. 믿음의 사람, 기도하는 사람,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과 비교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도전이 되어 열심을 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것을 기준 삼아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불평과 원망만이 남게 된다.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것들이 보인다면 외부 환경을 탓하기에 전에 먼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동시에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적 조건, 실력을 기준으로 자신을 본 것이 아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정확하게 본 것이다.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과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은 진정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믿음의 은혜는 멀리 있지 않다.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 자기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를 볼 줄 알아야 변화가 가능하다. 내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은 거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축복이 또 다른 축복을 부르고 은혜가 또 다른 은혜를 부르는 영적 사이클과 선순환이 이어지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나의 나됨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부족한 나에게 부어주신 조건없는 사랑에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지욱 목사/부천상록수교회

화-베드로의 두 가지 길
본문: 마 14:25~33
찬송가: 191장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적적인 체험을 원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늘 지치고 힘든 상황 가운데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복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주님과 늘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을 잘 알지 못했다.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셨어도 알지 못했다. 제자들이 주님을 모른채 유령이라고까지 했다. 그 후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한다.
 
주님은 베드로의 이 엉뚱한 요청에 대해 '오라'는 간단한 말로 대답해주신다. 베드로는 이 말씀에 힘입어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간다. 그 후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지게 되고 다급하게 주님께 구원을 요청한다. 그간 우리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때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에 주목해 왔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던 모습과 물속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주님께서 건져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이 베드로와 같다. 우리도 늘 믿음이 연약하여 늘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베드로가 걸었던 길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새로운 은혜를 얻을 수 있다. 베드로가 걸었던 길은 두 가지의 길이었다. 하나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주님께로 걸었던 길이다. 또 다른 길은 베드로가 다시 배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 두 가지의 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믿음의 차이가 아니다. 배에서 내려 걸을 때나, 배로 돌아오는 길에서 베드로가 믿음이 갑자기 커지거나 회복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길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다.
 
처음 길은 주님을 보면서 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주님과 함께 배에 올랐던 길이다. "배에 함께 오르매"로 기록하고 있다. 주님을 보면서 가는 길도 좋은 길이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걷는 이들이 훨씬 많은 것만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손잡고 걷는 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이 잡아주시는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길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2018년의 길을 되돌아보자. 주님 없이 내 맘대로 걸어간 길인지, 아니면 주님 바라보면서 가던 길인지, 주님이 내 손을 잡아주신 그 손에 이끌리어 걸어가던 길인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길을 확인했다면 이제 남은 길은, 남은 삶은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주님이 가자하시는 그 길로 걸어가길 소망한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것이 믿음이며,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붙들리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요한 목사/괴산중부교회

수-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자
본문: 출 17:8~16
찬송가: 358장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약 40명이 자살을 한다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9년 연속 자살률 1위를 기록하였다. 이런 우리 사회를 일컬어 '절망사회'라고 부른다. 히브리인들은 400년 동안 노예로 살며 군사로서 훈련받지 못한 약한 민족이다. 그에 반해 아말렉 족속은 낙타를 타고 발달한 무기를 가진 강한 민족이다. 전쟁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이지만, 히브리인은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첫째,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했다. 모두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세는 낙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기적의 하나님, 메마른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셨던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자신감, 용기가 승리의 원천이었다.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말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 있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야 한다.
 
둘째, 기도로 부르짖어야 한다. 성경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라고 말한다. 전쟁의 능력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사에게 있지 않았다. 모세에게도 있지 않았다. 기도하는 모세를 바라보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었다. 모세가 두 손을 들자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하나님께선 그 전쟁을 통해 전쟁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리기 원하셨다. 우리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두 손을 들고, 이 전쟁이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고백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선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셋째, 함께 하나 되어 나아가야 한다.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고 했다. 모세는 피곤하여 계속 기도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기도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론과 훌 덕분이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곁에 있는 누군가와 고민을 나눈다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나 되어 나아간다면, 우린 다시 일어설 수도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도록 하시고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소서.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삶의 자리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복희 목사/만촌동산교회

목-성도의 정체성
본문: 마 5:13~16
찬송가: 420장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의 윤리를 다루고 있는 말씀이다. 천국 백성인 성도들이 타인과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신 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이다. 성도의 정체성과 성도의 대사회적인 책임을 보여주는 말씀이요, 교회와 성도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첫째,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며,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금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이 소금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인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살맛이 나고, 거짓과 불의가 사라지고, 서로 신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이다. 다른 것을 좋게 바꾸면서 자신은 세속화 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셨다. 소금이 없으면 살 수 없듯,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세상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버림을 당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의 역할은 밝게 비추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빛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성도가 어둠 속에서 방황하거나 죄에 빠져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생명의 빛을 비추며 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세상의 참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아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어둠을 물리치면서 죄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본문 16절 말씀에 의하면 이 빛은 곧 착한 행실로 드러난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착한 행실을 보여줌으로써 빛을 발하게 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매순간 이루어지는 착한 행실이라는 빛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이기심으로 싸우고 경쟁함으로써 예수님의 선한 가르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런 교회와 성도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오늘도 소금과 빛이라는 성도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매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힘쓰자.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류시완 목사/포항창포교회

금-마음에 닿도록 말하라
본문: 사 40:1~11
찬송가: 93장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강영안 박사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로 '게토화된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게토'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바깥 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이 공간으로서의 교회에만 머무르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신앙이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 자연히 신앙인들이 쓰는 언어도 비신앙인들이 쓰는 언어와는 극명하게 괴리가 생겼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강 박사는 '교회 언어나 신학 언어가 아닌 세상의 언어로 진리를 말하라'고 조언한다.
 
게토화된 신앙적인 언어는 필연적으로 상투적인 언어가 된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된다는 말이다. 은혜, 사랑, 거룩 등이 더 이상 감격스러운 언어가 아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도 진정성이 없는 상투적인 언어가 됐다. 신앙의 당위성만 남았다. 그러한 습관적인 언어들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나 소망, 기쁨도 주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받아야 할 대상이다. 우리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복음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한다. 복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게토화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태도 때문이다.
 
주님께서 오신 계절이다. 성육신하신 그분은 하늘의 소리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 땅의 언어로, 이 땅에 위로를 전하러 오셨다. 오실 그분을 예언하는 선지자 이사야는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고 한다. 포로생활 70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알맹이 없는 헛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위로가 되지 않는 헛된 말이었다. 사람들은 그 어떤 희망의 소리가 들려와도 급기야 둔감해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고 하신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단순히 마음을 다독거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석하고 그 곳을 만지고 마침내 치유하는 참된 위로이다. 그 위로는 우리를 마침내 자유하게 한다. 땅의 언어로 나를 위로하시는 하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나의 가족과 부모와 형제,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그 마음에 닿도록 복음을 외치자. 오늘도 상처를 부여잡고 눈물 지으며 한탄하는 인생들의 마음에 닿도록 우리를 위해 피 한방울, 땀 한방울까지 다 쏟아내신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부르셨다. 나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늘의 이야기를 땅의 언어로 풀어보자.
 
오늘의 기도
우리 입술에 주의 영을 부어주셔서 생명의 예수님과 그의 생명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닿도록 전하고 나눌 수 있도록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변철 목사/삼보교회

토-주님처럼 알아주자
본문: 요 1:43~51
찬송가: 539장


본문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예수님,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바돌로메)이다. 하지만 주님과 나다나엘은 만난 적이 없다.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기다리던 메시아가 주님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 분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빌립의 말에 그가 비웃듯 말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니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빌립은 물러서지 않고 그를 잡아끌면서 그러면 가서 직접 확인해보자며 주님께로 데리고 왔다.
 
이렇게 빌립의 초청으로 주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어떻게 한 순간에 바뀐 것일까? 그것은 주님이 자신을 알아주신 것 때문이다. 주님은 그를 보시고 대뜸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자기 입장이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분명한, 그러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진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나다나엘에 대한 주님의 평가였고, 칭찬이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알아주심에 그도 온몸으로 응답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주님에 대한 이런 놀라운 고백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한 말씀에 완전히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만큼 값지고 신나는 일이다. 그래서 알아준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게 된다. 나다나엘이 그랬다.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 지방 브리기아와 리카오니아 등을 거쳐 현재 아르메니아의 알팍 지방에서 10여 년 간 복음을 전하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머리가 베어지는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자신을 알아주신 주님께 순교로 보답을 한 것이다.
 
서로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표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알아주고 이해하는 '심리적인 보살핌'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잘 알 수 없다는 것, 알아도 부분적으로 알고, 혹은 잘못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게, 온전히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은 주님뿐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아시면 족하리'라고 생각하며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잘 알아주시는 주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오늘의 기도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 내가 잘 알아주지 못함을 고민하게 하시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나를 알아주심에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양식 목사/기뻐하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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