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17일

11월 12~17일

[ 가정예배 ]

2018년 11월 10일(토) 17:49
월-네 자신을 연단하라
본문: 딤전 4:7~10
찬송가: 549장

이양재 목사/명성비전교회
가을에 단풍이 드는 것은 나뭇잎에 수분과 영양소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아 나뭇잎의 염록소들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단풍은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나무가 자신을 연단시키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봄이 되면 새싹들이 힘 있게 올라오는 것은 나무가 자신을 연단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생 후반부에 기록한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연단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생은 문제와 고난의 연속이다. 자신이 훈련되어 강하고 담대해지는 수밖에 없다. 같은 일을 겪어도 연단된 사람은 무리 없이 넘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허우적대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연단시킬 수 있을까?
 
첫째, 버리라. 바울은 먼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건전하지 않은 세속적이고 신비주의적 신앙과 신념을 의미한다. 대박을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성실한 노력과 수고 없이 무당에게 점을 잘 쳐서 횡재를 기대하는 심리가 숨어 있다. 이런 심리는 마약처럼 인생을 무기력하고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유라굴로 풍랑을 만났던 알렉산드리아호는 배 안에 있던 기구들과 짐을 다 버려야 했다. 나중에는 배까지 포기하고서야 276명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둘째, 자신을 연단하라. 바울은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권면한다. 모든 분야의 리더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일정한 기본기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관리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식도 많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자기관리가 되지 않아 한순간 무너지는 것을 본다. 글로벌 기업의 CEO 중 상당수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활동을 시작한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밤에 절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관리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셋째, 경건을 추구하라. 경건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5번 쓰였는데, 그중 디모데전서에서만 9번 쓰였다. 그만큼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이란 쉽게 말해,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된 삶이다. 다윗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셨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누구보다 예수님은 경건하셨다.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추셨다. 경건을 추구하면, 경건의 능력이 나타난다. 누구든지 약하고 부족할지라도 경건을 추구할 때 약함이 강함이 되고 부족함이 채워지는 하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수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에 대해 낙심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버릴 것은 버리고 경건을 추구함으로 우리 자신이 연단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곧 버리고 예수를 따르다
본문: 마 4:18~22
찬송가: 435장

장대영 목사/안강영락교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갈릴리 해변의 많은 어부들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주님이 그들만 찍어 부른 것이 아니었다면, 그날 갈릴리의 많은 어부들은 모두 똑같은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응답한 사람은 넷 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해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마태는 제자가 된 넷에게 '곧 버려두고 따르니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곧' 즉시 응답했다. 응답을 미루지 않았기에 제자가 됐다. 부르심의 말을 두고 이 생각, 저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날 부름을 받았던 많은 어부들 중에는 부르시는 말씀이 터무니없는 말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자들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응답을 미루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주님은 벌써 저만큼 가버렸고 결국 그들은 때를 놓치고 말았다. 주님은 벌써 다른 사람을 부르고 계셨다. 믿지 않는 자는 생각이 많다. 그러다가 응답을 미루게 되고, 결국 기회를 놓친다. 좋은 신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미루지 않는다. 말씀에 응답을 미루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둘째, 그들은 '버려두었다.' '버려두었다'로 번역된 말은 마치 나중에 다시 되찾아 사용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요한복음 21장 사건 때문에 이런 번역을 시도했는지 모른지만, 마태복음 안에서만 생각하면, 그들은 지금 버린 그것을 붙들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버려두었다'보다는 '버렸다'가 더 좋은 표현이 될 것 같다. 사명을 위해서는 멀리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 있고, '절대로' 떠나야 하는 삶이 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렸고,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아버지를 버렸다. 그물보다 배와 아버지가 더 가치 있는 것이지만, 버려야 하는 것은 상대적 가치에 있지 않고 절대적 가치에 있다. 절대적으로 버려야 하고, 떠나야 하는 삶이 있다.
 
셋째,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가 앞서 가고, 그들은 뒤따라 가는 모습이다. '따라갔다'는 말을 곰곰이 그려보면, 예수 있는 곳에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은 그들이 예수를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주님 부활 후엔 주님이 그들을 따라가신다. 지금은 예수님이 있는 곳에 그들이 함께 하고 있지만, 훗날에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주님이 함께 하는 것 같지 않아서 답답하다면, '나와 함께 해 달라'고 부르짖지만 말고, 자신이 지금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을 미루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옵소서. 듣겠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본문: 눅 8:49~56
찬송가: 545장

여성우 목사/한빛교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며 예수님께서 자기의 집에 오시기를 간청한다.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사회의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나와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이 긴급한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시고 쾌히 승낙 하셨지만 그 집으로 가던 길에서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의 사건으로 지체하게 된다. 그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딸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이 집에 오셔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
 
첫째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죽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네 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너는 끝장이다. 이제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진정한 믿음은 '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으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순간에도 믿으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
 
둘째로 믿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내 마음의 두려움이다. 우리 마음에 크고 작은 많은 두려움들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한다. 두려움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365회나 나온다. 일년 365일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지만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을 가질 때 사라진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다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셋째로 믿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는 오직 믿음이다. 그래서 주님은 늘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 믿음이 자라게 된다. 그런데 사단은 늘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방해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능력이 일어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믿음이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오늘의 기도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머리를 깎은 바울
본문: 행 18:18~23
찬송가: 293장

최영태 목사/대현교회
혹시 서원기도를 해보았는가? 사도 바울은 어떤 이유에서 서원을 하고, 겐그레아에서 머리까지 깎았을까?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에서 서원기도를 했는가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서원들이 있다. 야곱이 드린 서원기도이다(창세기 28장). 야곱이 서원기도를 드린 이유는 캄캄한 벧엘광야에서 두렵고 떨리며 불안과 초조 속에 있는 야곱 자신을 친히 찾아주신, 심방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인해 깊은 감동과 감사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사무엘상에서 한나가 드린 서원기도이다. 한나가 서원기도를 드린 이유는 사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통치하던 시대에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 같은 타락한 제사장들이 사사로 있다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또한 민수기 6장에서 머리를 깎는 서원기도(일명 나실인의 서원)이다. 그러므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던 바울의 서원기도는 두렵고 떨리며 불안과 초조함 속에 있었던 야곱과 한나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인해 깊이 감사함으로 드렸던 서원기도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 바울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헌신의 서원기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겐그레아일까? 고린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헌신의 서원을 했을까? 하나님은 약하고 두렵고 떨었던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시며 고린도에서 엄청난 은혜를 주셨다.
 
고린도에서 이런 놀라운 선물을 받은 바울은, 자신이 약하고 떨고 두려웠을 때 가졌던 '나만 홀로 남았구나!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렇게 하실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죄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시리아의 안디옥교회로 돌아가기 전 겐그리아에서 이제는 그 어떤 외로움과 두려운 상황 속에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은혜를 평생 의심하지 않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겠다는 서원을 하고, 고린도를 떠나기 전 머리를 깎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가 생명을 바칠수 있을 만큼 믿을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고 감사와 헌신의 서원을 했을 때의 사도 바울처럼 우리들이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의 은혜라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주의 은혜라고, 우리들이 이 자리에 앉아 예배하는 것은 주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이 시간 저희들과 함께 하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제자로 부르심
본문: 마 4:17~25
찬송가: 202장

노재근 목사/감교교회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미 세례요한이 이 말씀을 했었고, 주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 선포하신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따라서 천국은 '내 나라'라고 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의 선포는, 단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종으로서의 선포이지만 그리스도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자 왕으로 선포한 천국으로써 사모하는 자들에게 새 희망이 되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천국의 길잡이가 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되 먼저 갈릴리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 형제를 부르시니 네 명의 사람이 배와 그물, 부친을 버려두고서 즉시로 예수님을 좇았다.
 
이들을 제자로 부르셨는데,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며, 이어서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제자는 자신의 부족함이나 염려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스승이신 주님이 알아서 다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이제는 예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세다. 나아가 교회의 사명으로 복음전파, 교육, 치유의 3대 사역을 균형 있게 감당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자를 일꾼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제자된 자는 또 다른 제자를 낳아야 한다. 한 사람의 열매를 맺기 위해 눈물겨운 수고와 희생이 따르는데, 이를 각오해야 한다.
 
진정 자신의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주님을 따를 수가 있다. 오늘날 교회마다 제자훈련을 많이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의 결단을 내리는 성도는 많지 않다. 초대교회처럼 되기를 소원한다면,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를 즉시 따라야 한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유식하고, 권력 있는 자들을 부르지 않고, 갈릴리의 보잘 것이 없는 자들을, 천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온 갈릴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게으름을 피우시거나 중단하시지 않고 계속하셨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나라에 200여 개의 성읍과 마을들이 있었고, 인구는 3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도시를 열심히 다니셨다.
 
주님의 치유와 이적들은 죄와 사망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구원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기 위함이였다. 이제는 예수님 대신 우리들이 활동해야 할 때다. 예수님의 제자된 자로, 세상 속에서 주님처럼 힘 있고, 다양한 사역을 펼쳐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 구원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될 수 있게 하자.
 
오늘의 기도
진정한 제자로 확정하셨으니 그에 응답하여 삶에서 나타내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거듭나자
본문: 요 3:3~5
찬송가: 249장

박복점 목사/안식관 은빛사랑공동체 원장
유대인의 지도자중 바리새인으로 니고데모가 있었다. 그는 가나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과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통하여 심적 갈망가운데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이 표적을 하셨다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죄 사함을 받고 은혜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활의 끝은 어디일까? 생로병사의 해결점인 우리의 소망이요 살아갈 목표인 하나님 나라이다. 소망이 없는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하며 살아갈 힘도 나지 않는다. 본문5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첫째로 물로 거듭나야 한다. 물은 깨끗하게 씻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생활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성결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로 세례를 행하므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라면 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며, 이 과정은 믿음의 기초가 되어 성숙한 영성에 이르게 한다.
 
둘째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이란 능력의 상징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을 거룩한 영으로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능력이 우리에게 들어온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 하신 후 500여 명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길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나게 하고 죄를 회개시키며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이루어졌으며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신구약성경을 요약한 복음은 요한복음 3장16절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간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나라의 길로 들어가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예수님만이 우리 안에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오늘의 기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능력있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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