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27일

10월 22~27일

[ 가정예배 ]

2018년 10월 19일(금) 14:16
월-진실한 믿음
본문: 눅 18:1~8
찬송가: 545장

강성효 목사/장수교회
국어사전을 보면 신자란 '믿는 마음, 신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를 신뢰하고 복종함'이란 두 가지 풀이가 있다. 첫번째의 경우 '믿는 마음'이 믿음이라면 이 때의 믿음은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믿음의 대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 믿음의 대상은 반드시 종교적 대상일 필요는 없다. 두번째의 경우 '신뢰하고 복종함'이란 말은 첫번째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사람의 마음이나 태도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라는 전제는 첫번째 의미와 크게 다르다.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신자란 바로 이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알고 진실하게 믿는 사람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음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사망에 이른 인간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은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동시에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사람도 없고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신을 어떻게 믿으며 무엇을 근거로 믿는다는 말인가? 두 가지로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 우주 만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중에서도 내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어떤 초인이 있어 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지금도 운행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초월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는 믿음로만 알 수 있다. 소위 일반계시다.
 
다음은 특별계시인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한 기록물이 아니며 인간의 작품은 더욱 아니다. 1600여 년 세월을 넘게 하나님을 경험한 40여 명의 선지자들과 종들과 사도들의 일관된 신앙의 증거물이다. 또 다른 말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사람에게 주신 책인데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믿음의 도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성경에 약속된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고 행동하며 사는 신자를 보겠느냐?"는 반문이다. 참으로 두려운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말씀의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질투하시는 하나님
본문: 욜 2:18~20
찬송가: 387장

노경천 목사/제주성지교회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남 유다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번창했던 시대이지만 동시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회개하라는 말씀과 함께 구원과 은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신다. 본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18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신다"라고 했다. 이 구절이 옛 성경에는 '중심이 뜨겁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극진히 사랑하는 하나님, 중심이 뜨거운 하나님'을 엘칸나, 즉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고 계신다.
 
'질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기가 동반된 질투요, 둘째는 사랑이 동반된 질투다.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이 동반된 질투다. 즉 사랑 때문에 생기는 질투다. "나는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너는 왜 아직도 내 사랑을 모르느냐?"하는 질투이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고 포용하는 마음이다. 18절 하반절에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끌어안고 포용하고 용납하고 용서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신다.

19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환경은 그대로 어렵지만 그 속에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19절 하반절에서 20절 상반절에 "내가 더 이상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척박한 땅으로 쫓아내리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떠나면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지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씻어주시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렸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준비했던 새 옷을 갈아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워 주셨고 잔치를 베풀며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다. 오늘 하나님께 돌아오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나의 자녀다. 내가 극진히 사랑하는 나의 자녀다. 내가 끔찍이 아껴 질투하는 나의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의 가락지, 언약의 가락지를 끼워 주신다. 그리고 은혜의 잔치를 베풀며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좋은 날 보기를 원하면
본문: 벧전 3:10~12
찬송가: 542장

이정식 목사/경인제일교회
베드로전서는 네로 황제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무렵,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굳게 하여 박해를 이기고 승리하도록 위로와 격려를 해주기 위해 쓰였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로 환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첫째, 혀를 절제해야 한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같은 사람이라도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외모는 그럴듯한데 사용하는 언어 때문에 품격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는 시원치 않은데 그의 언어 때문에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이 지닌 것들을 현재에서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미래를 결정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좋은 날(미래)'을 원한다면 말을 잘 사용하여 좋은 것을 미래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잠언 18장 21절에는 이렇게 말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 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비싼 명품으로 치장을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허무함을 맛보게 될 뿐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선하게 사는 삶, 화평을 따르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삶이다. 좋은 날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선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사는 것,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것이다.
 
셋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향한 영광이요 복임을 알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은혜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온몸을 다해 매달려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신을 향하는 의인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고, 그 기도에 은혜로 응답하셔서 영광된 삶을 허락하신다.
 
오늘의 기도
좋은 날 보기 위하여 우리의 혀를 절제하고, 서로 화목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영원한 천국에 마련된 상급을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정식 목사/경인제일교회

목-썩지 않는 양식이란?
본문: 요 6:22~31
찬송가: 80장

손경란 목사/어부동교회
요한복음 6장은 죄인들이 진정한 만족과 배부름과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떡은 인간들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어낼 수 있는 이 세상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장이다. 본문도 역시 행복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인간들의 세속적 행위나, 이 땅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해 쌓는 세상의 힘이 왜 그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양식이 될 수 없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26절에 주님께서 당신을 찾아와 왕을 삼으려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떡을 먹고 배가 부른 연고로 주님을 찾은 것이지 진정한 하늘의 복을 찾아 주님께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흔히 26절에 나오는 배부르게 하는 떡과 27절의 썩는 양식이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힘을 쌓는 일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인 하나님 일에 열심을 부려야 한다는 결론내린다. 물론 성도는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힘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 만일 썩는 양식이 이 세상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주님은 오병이어로 썩는 양식을 만들어서 먹이신 것이다. 이는 성경의 진의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금하시는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과연 무엇일까?
 
자신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신 주님께 계속해서 배부르게 해 달라고 찾아온 자들의 그 행위를 가리켜 주님은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배를 불린다는 의미는 '자기만족'을 말한다. 나 자신을 위한 헌금, 나 자신을 위한 기도, 나 자신을 위한 선교, 나 자신을 위한 구제, 나 자신을 위한 봉사 이 모든 것들이 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다.
 
27절을 보면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시면서 그 양식은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신다. 주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당신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주님이 그 양식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나의 욕심과 정욕을 채우며 나의 비전을 성취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썩지 않는 양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까'를 고민하며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하나님의 기쁨'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하는 자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찾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기쁨과 감사가 있는 가정
본문: 눅 15:3~7
찬송가: 408장

연광희 목사/산성교회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데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목적 없는 여행은 쉽게 지치고 후회가 남기도 한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가난한 자를 자유케 하시고, 얽매인 자를 풀어주시고, 무엇보다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전 인류의 원죄를 소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첫째,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이시다. 본문 이야기는 매우 잘 알려져 있는 '길 잃은 양'의 비유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목자로 생각할 수 있다. 목자는 양들 틈에 뛰어다니며 한 마리의 양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옳은 길로 인도한다. 그런데 한 마리 양이 외로움과 소외감,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 한 마리의 생명을 위해 저녁부터 날이 밝아올 때까지 잃은 양을 찾아다닌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도 그렇다. 우리가 길 잃은 양같이 외로움, 소외감, 두려움을 느낄 때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둘째, 찾아와 위로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찾아낸즉 즐거워…" 예수님은 잃어버렸던 영혼을 찾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신다. 목자는 양을 찾은 후 양을 꾸짖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양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그저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고, 십자가를 짊어 지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를 선포했다. 더불어 구원이라는 선물까지 주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이것을 믿고 예수님의 위로를 느끼며 기쁨으로 충만된 삶을 살아가는 가정이 되시기 바란다.
 
셋째, 생명을 찾음으로 기뻐하시는 예수님이시다. 본문에서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며, 기쁨과 즐거움에 충만해 있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목자는 기쁜 마음에 잔치를 베풀려고 한다. 잔치에 베풀 음식이 무엇일까? 바로 목자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양일 것이다. 한 마리 양을 찾고 다른 한 마리 양을 희생하는 우스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목자는 개의치 않는다. 목자는 양의 수량에 가치를 두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비유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가정의 잃어버린 영혼, 주님께로 돌아와야 할 영혼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자. 모든 가정이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나누고 감사할 수 있는 가정이 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가정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하나님의 꿈을 이루게 하소서
본문: 행 1:1~8
찬송가: 521장

오성민 목사/금촌교회
스위스에는 헨리 듀넌트라는 유명한 은행장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던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폴레옹을 만나고 싶어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 시대의 거목을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고 싶은 야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위스의 은행장으로서 프랑스와 스위스간의 경제협력의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드디어 스위스 경제 사절의 임무를 띠고 파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황제가 막 전쟁터로 떠난 직후라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싸우는 전쟁터까지 따라 갔다. 듀넌트는 난생처음 전쟁이라는 것을 보았고, 포탄이 날아들고 인간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 듀넌트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그곳에서 오랜 기간 동안 의사들을 도와 부상병을 처리하고 시체를 치우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스위스로 돌아와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평화에 대한 꿈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전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이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친구들과 함께 적십자를 만들고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본문에도 듀넌트와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에게는 멋진 꿈이 있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셔서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는 자신들을 독립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들의 꿈은 무너졌다.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꿈을 산산조각 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전에 생각지 못한 이전보다 더 위대한 꿈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바로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세계를 밝히며 사는 사람으로서 불러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작은 이스라엘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세계를 생각하셨다. 제자들은 자신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세계 열방의 사람들을 생각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보다 우리를 위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간구하심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멈출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꿈과 소망들을 수없이 포기하였지만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한 번도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이 생각지 못한 더 큰 꿈을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가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새로운 꿈과 희망을 준비하고 계신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꿈과 희망을 소망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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