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그리고 윤동주

얀 후스 그리고 윤동주

[ 기고 ]

탁지일 교수
2017년 09월 26일(화) 14:06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는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화형당한 장소가 있다. 적대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린 후스는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의 유골은 강에 뿌려졌다.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믿고 조국 체코를 떠나 6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콘스탄츠에 도착한 그는 곧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후스는 옥중서신들을 통해 조국 체코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하지만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려고 마음먹었던 종교회의에서 후스는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되어 마침내 화형을 당한다.

종교회의가 열렸던 장소에서 후스가 화형당한 곳은 수백 미터 떨어져 있다. 후스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후스의 머리에는 '이단의 괴수'라고 적힌 모자가 씌워졌고, 그의 책들이 불태워지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길을 나서자 무장한 수많은 적대자들이 후스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뒤를 따랐다. 형장에 도착한 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 후, 평안한 모습으로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조국 체코를 떠나, 멀리 떨어진 적국(敵國) 독일의 낯선 마을에서 외롭게 죽어간 후스를 생각할 때, 일제강점기 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서서히 죽어간 시인 윤동주가 문득 떠올랐다.

조국을 떠나 일본 교토에서 유학하던 윤동주는, 귀국을 앞두고 항일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매달 한 장씩만 허락된 옥중엽서에 그의 심정을 담아 조국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낯선 적국의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한 윤동주와 후스의 외롭지만 의연한 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콘스탄츠를 떠나 후스개혁의 중심인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다. 후스의 흔적을 따라 걷다가, 광장에서 후스의 동상을 보았다. 다소 슬픈 모습의 후스는, 광장 옆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尖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교회는 한때 후스개혁의 중심이었지만, 가톨릭성당으로 바뀐 곳이다.

첨탑 위에는, 후스파의 상징인 황금성배를 녹여 만든 성모마리아상이 있었다. 좌절된 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린 첨탑을 바라보는 후스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 순간 교회의 첨탑 십자가를 바라보던 윤동주와 그의 시 '십자가'가 떠올랐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슬픈 눈으로 교회당 첨탑을 바라보았던 후스와 윤동주. 위기의 조국에 살았고, 적국(敵國)에서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지만, 순교자적 신앙을 끝까지 지켰던 이들은 비록 서로 다른 시공(時空)을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동일한 신앙을 지켰던 '부끄럼'없는 믿음의 선진들이었다.

1415년 초 후스는 "나는 감옥에 앉아 있으나, 부끄럽지 않습니다"라는 글로 시작되는 그의 옥중서신을 썼고, 1941년 늦은 가을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그의 '서시'에서 고백했다.

후스가 화형당한지 100년이 지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루터의 개혁 이후 500년이 지났다. 하지만 루터의 가도(街道)를 달리며 오늘의 독일에서 느낀 것은, 루터가 '개혁 아이콘'인지, 아니면 '사업 아이템'인지 모를 혼란스러움이었다. 그리고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문득 느껴지는 것은, '개혁의 주체'인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지 모를 묵직한 답답함이다.

탁지일 교수
부산장신대학교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