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길 따라온 걸음' 돌아보니 주의 은혜라

'생명의 길 따라온 걸음' 돌아보니 주의 은혜라

[ 아름다운세상 ] 평생 선교봉사 사역에 헌신한 정봉덕 장로

김성진 ksj@pckworld.com
2016년 02월 23일(화) 13:39

진정한 지도자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기 보다는 낮아져서 겸손히 섬기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총회와 전국교회를 섬겨온 진정한 일꾼이 있다. 겸손히 총회와 전국교회를 섬기는 일에 작은 밑거름의 역할을 감당했던 덕암 정봉덕 장로(염천교회 원로). 늘 겸손한 모습이 몸에 배어있는 그의 섬김에는 구석구석에서 작은 열매를 찾아볼 수 있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주위에서 여전히 '청춘'이라고 불릴 정도로 작은 일에도 열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최근 그는 자신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지난 세월 자신이 일구어 놓았던 일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고소란히 담아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부족한 사람을 불러 도구로 사용해주셨습니다. 저는 전국교회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정봉덕 장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묵묵히 걸어온 삶을 발자취를 이렇게 고백했다.

1928년 평북 정주군청 소재지 읍에서 서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농촌마을 정촌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나서 여흘밖에 안됐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중학교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해방된 후,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단신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이후에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그곳에서 신앙을 갖게 됐고 세례도 받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를 붙잡아준 것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군대는 내 인생을 180도 바꾸었습니다. 그동안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막연한 자유를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된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군에서 군종으로 섬기면서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7년간 군목무를 마치면서 실천으로 옮겼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총회 전도부 간사로 총회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졸업 후 군에서 만났던 황금천 목사의 요청으로 전도부 직원으로 들어가게 된 것. 500개 무교회 면 개척 전도사업과 산업전도, 이단 사이비 집회에서 교회를 보호하는 운동, 해외에 첫 '전도목사'를 보내는 일 등은 그가 전도부 직원으로 섬기는 기간중에 진행된 일이다. 1959년 9월 제44회 총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나눠지는 아픔 속에서 그는 총회를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총회 본부 간사로 불러주셨다.

당시, 총회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았고 총회 회록도 출판되지 않아 회의를 진행하는데 어려움과 불편함이 많았다. 그는 총회 서기와 총무의 승인을 얻어 총회 회의록과 총회 순서를 포함한 총회 보고서를 작성해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부 보고서와 각 노회보고서 및 통계표가 포함된 종합보고서를 별도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총회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공부와 목사 임직에 대한 열망과 미련이 항상 남아있던 상황에서 미국 유학의 기회가 찾아와 가족을 남겨두고 1969년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무거운 마음 때문에 결국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했다. 1971년 총회 간사로 복직된 그는 한국기독공보 총무국장을 겸임한 후 초대 전무이사로 근무하며 본보 자립기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의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아 총회 사회부 초대 총무로 부름을 받았다.

총무로 봉사하며 총회 은급금운용위원회(현 총회연금재단) 사무국장과 총회 자선사업재단(현 총회복지재단) 사무국장을 겸임하며 총회의 기반을 닦는 일에 앞장서왔다. 11년간 사회봉사부 총무로 섬긴 그는 사회선교지침을 마련하고 사랑의 현장갖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를 퇴임한 후에는 한아봉사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로 10년간 봉직했다.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초대 상임이사로 봉직한 그는 제94회 총회와 제100회 총회에서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는 총회 사회부 총무를 마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세계교회의 사랑에 보답하는 나눔의 선교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생각이 지난 1991년 봄 독일 개신교개발원조국 창립기금을 지원받아 설립한 기관이 아시아 지역 국가를 선교하는 한아봉사회였다. 이삼열 박사, 김용복 박사, 고 박창빈 목사, 오재식 박사 등이 앞장서서 이 일을 도와줬다. 10년간 봉사하고 세대교체를 위해 자진 사임한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봉사 기금을 조성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를 계기로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을 창립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급성장기에 총회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한국교회가 자립과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교인을 바르게, 교회를 교회되게 세우지 못한 점을 무척 안타까워한다. 그는 교역자들이 '모든 직업은 천직'이라고 말하면서 교역자라는 직분에만 특별대우를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며 근로소득세를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교역자들이 교인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45년간 반평생 선교봉사 사역에 헌신한 그는 총회가 하나님의 도구로 잘 쓰임 받기 위한 제안도 빼놓지 않았다. 깨끗한 선거 풍토를 만드는 일과 노회 총회의 각종 회의비용은 지교회가 책정한 예산으로 충당하자는 주장 등이다. 그리고 남북분단 7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통일이 머지 않아 이루어 질 것을 소망하며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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