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심은 씨감자 '평화의 꽃' 피우길 소망한 흰머리 소년

북녘에 심은 씨감자 '평화의 꽃' 피우길 소망한 흰머리 소년

[ 아름다운세상 ] 사회봉사, 북한선교에 평생 헌신한 고 박창빈 목사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4년 11월 04일(화) 15:15
   
▲ 한아봉사회에서 라오스에 건축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박창빈 목사.

'영원한 흰머리 소년' 박창빈 목사가 향년 72세의 나이로 지난 9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도시선교, 사회봉사, 북한선교를 위해 헌신한 그를 사람들은 '영원한 흰머리 소년'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마음이 항상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일을 한다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다.
 
큰 단체의 수장이나 화려한 직함을 가진 적이 없는 박 목사이지만 그를 알고 그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모두들 좋아하고 존경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며 사심 없는 봉사로 평생을 청빈하게 마감한 박 목사를 위해서 장례식장에서는 출석하던 신목교회 주관으로 입관예배, 월드비전 주관으로 위로예배, NCC 화해통일국 주관으로 조문예배, 총회와 에큐메니칼권 주관으로 발인예배가 드려졌고, 장지에서는 여교역자안식관 주관으로 안장예배가 드려졌을 정도로 각계 각층에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애도했다.
 
1943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신의주 제3교회에 출석하다가 가족이 함께 한경직 목사를 뒤좇아 월남했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 모두 영락교회 출석교인이 되었다. 월남 후 대광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박 목사는 졸업 후 장호원 기술고등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그는 1970년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에서 지역사회조직가 제4기 훈련을 수료했다. 졸업과 동시에 부산 제4부두 일대에 위치한 근로자 합숙소에서 부두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도시문제연구소 지역사회 조직가 훈련 담당 간사로 활동하던 그는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반대하다가 남산 정보부 지하실에서 1주일간 취조를 받기도 했다. 다행히 강원도 문막성당의 마이클 신부와 영락교회 박조준 목사가 신분 보장을 해주어 몇몇 친구와 함께 석방이 됐다.
 
이후 망원동제일교회 개척자 이상량 전도사의 권유로 본교단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해 학문과 경건의 훈련을 쌓은 그는 졸업도 하기전 당시 본교단 총회 사회부 총무였던 정봉덕 장로에게 발탁되어 간사로 발령을 받고 목회자사회선교 훈련을 담당했다.
 
1985년에는 독일 서남부 라인란트 팔츠주 세계선교부 총무 게르하르트 프리츠 목사의 추천으로 독일 팔츠주교회 초청을 받아 에큐메니칼 선교동역자로 3년간 선교를 하기도 했다. 3년 후인 1988년 정봉덕 장로에 이어 2대 사회부 총무에 임명된 그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회부에 이어 총회 자선사업재단(현 한국장로교복지재단) 사무총장이 된 그는 노회와 지역교회의 사회복지 사업을 재단법인에 소속시키며 교회와 지역사회의 관계를 확대해나갔다. 사무총장 재임시절 은퇴목회자를 위한 안양원로원을 공주로 이전시키고 지방 노회와 교회들이 연합해 지역 은퇴목회자들을 돌보도록 지원했다. 연금재단 사무국장을 맡아서는 총회의 힘 있는 인사들의 입김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원칙대로 기금을 운영해나갔다.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서는 모두들 그의 우직함과 원칙을 지키는 소신을 인정하게 됐다.
 
1995년 12월 19일 총회 연금재단 이사회를 마지막으로 총회 기관 목회 17년을 마무리한 그는 스스로 무급 안식년을 선언,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본교단 총회 임원회에서는 박 목사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부총무로 파견시키기로 내부적인 결정을 내리고 이제 파송만 남은 상황에서 박 목사의 인생 방향을 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NCCK 부총무로 임명되기 바로 직전 월드비전 오재식 회장이 무조건 와서 자신의 사역을 도우라고 요청한 것.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박 목사는 기도 후 월드비전을 택했다.
 
이후 그는 월드비전에서 북한전문가로 활동하며 인도적 대북지원에 앞장섰다. 그는 그의 저서 '감자꽃이 피다'에서 "돌아보면 월드비전 16년 사역은 전국교회를 찾아다니며 펼쳐온 디아코니아 선교현장을 북한 땅으로 옮긴 것이며, 멀리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내다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이었다"고 고백했다.
 
월드비전 기획연수국장 겸 북한사업팀장으로 발령 받은 그는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고지대가 많은 북한에는 감자농사가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북한에 감자 기술지원 프로젝트를 주관했다. 이 프

     
로젝트를 통해 남한에서 개발한 씨감자가 북한에서 장려품종이 될 정도로 북한의 식량난 해결과 민간외교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에 큰 도움을 주었다.
 
2002년 선교센터장을 맡았지만 2003~2007년까지는 한아봉사회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겨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역사회 개발과 복음전도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박종삼 회장의 요청으로 북한사업 수석자문을 맡아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 회장의 임기가 연장되면서 박종삼 회장은 3년간 COO(Chief Operating Officer)로서 북한사업 총괄 부회장으로 동역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 목사는 다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동북아 평화구축의 비전을 품고 북한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는 월드비전 퇴임식에서도 증명됐다. 2013년 12월 26일 월드비전을 퇴임하던 날, 월드비전 북한사역에 동참한 농학자들이 뜻을 모아 서명해 박 목사에게 명예농학박사 학위를 수여해주기도 했다.
 
은퇴 후 자신의 북한 사역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생을 마감하기 3달전인 6월 15일 그의 사역의 기록이 담긴 '감자꽃이 피다(대한기독교서회)'가 출간되어 다행히 그간 추진했던 북한관련 사역을 보다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사)참된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법인 이사로 재임하면서, 단체 5주년 기념원고로 썼던 글들을 뼈대로 해서 96권의 자필 노트를 정리하며, 생생한 사역 모습을 소개했다.
 
박 목사는 평생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의 생명 파이프가 되어 축복의 샘 줄기를 세상으로 잇고 싶어 했다. 자신의 집마저도 BSM 하우스(Blessing Spring Mission House)라고 명명하고, 다락방을 기도방으로 꾸며 매일 새벽과 저녁마다 감사예배를 드린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감자가 영글어가듯 한반도에도 평화의 줄기가 자라기를 기원하며 기도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남과 북이 핵탄두를 쌓으며 대결장을 펴봤자 공멸하는 길을 부르는 것 아닌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남북의 기류를 보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씨감자 알알이 평화의 꽃으로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선한 일을 하다가 실망하지 말라고 주님을 격려하신다. 그렇다. 때를 얻든 못 얻든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땅에 심는 일이다.(그의 저서 '감자꽃이 피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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