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야구는 야구다!

보이지 않아도... 야구는 야구다!

[ 아름다운세상 ] 시각장애인 야구 보급에 앞장서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4년 05월 19일(월) 16:43
   
▲ 지난 15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장군봉근린공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기다렸던 야구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타격 연습인가요? 수비 연습인가요? 우리 게임해야죠!"

스승의날이던 지난 15일 오후 1시 30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관장:김미경)에서 장군봉근린공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야구를 사랑하는 5명의 시각장애인과 체육지도자 및 자원봉사자 8명이 오늘의 취재원들이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은 지난 2011년 처음 시각장애인 야구교실을 개설하고 시각장애인 야구 보급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실로암 야구교실이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체 청백전 외에는 정식 게임을 할 수 있는 상대팀이 없기 때문이다.

"OOO 씨도 며칠전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하던데 오늘 못오겠네. 요즘 다들 왜 이렇게 결석율이 높은거에요?" "자원봉사 선생님들도 함께 뛰셔야죠! 지금까지 5명인데 한 명이 더 왔으면 좋겠다."

버스 안 대화의 주제는 한마디로 '과연 오늘 게임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다. 그만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야구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충주성심학교를 모티브로 한 영화 '글러브'에서 청각장애인들의 야구는 소개된 적이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의 야구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야구가 무척 궁금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고 이어진 타격 연습 시간, 체육지도자인 복지관 직원 정자익 씨가 투수 마운드에 섰다. 1964년 미국에서 고안된 시각장애인 야구는 일반 야구와 룰이 많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투수와 타자가 같은 편이라는 점. 어디까지나 잘 칠 수 있도록 던지는 것이 투수의 임무이기 때문에 투수와 포수는 시각장애인이 아닌 정안인(正眼人)이 맡아야 한다.
 

   
▲ "움직이는 공을 타격할 때의 쾌감이 너무 좋다"는 오원희 씨(右)는 5이닝으로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 1회에만 2안타 2타점을 올렸다.

또한 안대를 착용하면 누구나 시각장애인 야구에 참여할 수 있다. 투수와 포수를 제외하고 한 팀당 최소 3명만 있으면 경기가 가능한데 이날은 자원봉사자 한 명이 안대를 끼고 부족한 인원수를 채웠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 중엔 단순히 학점 이수를 위해 왔다가 계속 봉사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포수를 맡고 있는 박정수 씨(31세)는 "똑같이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룰을 변경해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야구를 통해 같은 행복을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봉사에 참여하는 소감을 밝혔다.

"셋, 레디-고! 뚜-뚜-뚜-뚜."

일반 야구공 2~3배 크기인 'Beep Ball(시각장애인 야구의 공인구)'이 투수에 손에서 떠나는 순간, 모두의 청각이 일제히 "뚜-뚜-뚜-뚜" 소리가 나는 공으로 향했다. 'SILOAM'이라고 쓰인 유니폼은 지난해 고양원더스에서 기부해준 것으로 이날 처음 참여한 강인철 씨(48세)와 자원봉사자를 제외하고 모두 새하얀 유니폼을 착용했다.

삼성라이온즈의 팬이라는 강 씨는 "오늘 처음 해봤는데 소리를 듣고 해보니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축구는 스피드가 빨라서 모르겠지만 야구는 보이지 않아도 연상이 된다. 다른 스포츠 보다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 이들의 야구는 특별하다. 승패가 중요치 않다. "함께 뛰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3루수인 오원희 씨(52세) 역시 삼성라이온즈의 팬이다. 2년째 야구를 하고 있다는 오 씨는 "'서있는 공'이 아니라 '움직이는 공'을 타격할 때 그 쾌감이 너무 좋다. 움직이는 공을 타격하면서 감각을 테스트할 수 있고 수비할 때도 서있는 공을 잡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공을 잡는다"고 야구가 좋은 이유를 설명했다. 요즘 타격감이 한창 물오른 그는 5이닝으로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 1회에만 2안타 2타점을 올렸다.

1973년생인 표기철 씨의 포지션은 유격수다. 어린 아이를 구하다 입은 사고의 영향으로 지난 2003년 중도 실명한 그는 워낙에 운동 매니아다. 사고 전 프로복서들의 스파링 상대로 일했던 그는 지금도 매일 9시부터 3시까지 복지관 체력단련실에서 런닝머신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고 했다.

"근육을 키우려고 운동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 몸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죠. 우리 단장님이 늘 운동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시각장애인이 되고 보니 그 말이 맞더라구요." 함께 어울려 야구하고 서로 대화하는 이 시간이 제일 좋다는 그가 말했다. "지금은 제가 제일 행복해요.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시각장애인들의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배려'다. 승패는 중요치 않다. 공과 베이스에서 나는 소리를 잘 듣고 타격과 수비, 주루에 성공하기를 서로 응원하며 경기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회 이사장 김선태 목사는 "옛날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으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야구 뿐 아니라 꿈과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의 새 아침이 밝아온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시각장애인 야구는…

   
▲ "뚜-뚜-뚜-뚜" 비프음이 나는 공. 일반 야구공의 2-3배 크기다.

미국에는 상대적으로 시각장애인 야구가 활성화돼있는 편이다. 지난해 7월 28일~8월 4일 미국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월드시리즈에는 241명의 시각장애인 선수와 204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는데 대부분이 미국의 도시 팀이었고 아시아에서는 야구 열기가 높은 대만에서 1팀이 참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야구는 프로 종목 중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시각장애인 야구는 보급 단계에 그치고 있다. 음향장치가 포함된 시각장애인 야구공은 개당 3만7000원인데 고장으로 소리가 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소모품에 가깝다. 베이스 2개와 전자장비, 연결선 등으로 구성된 베이스 세트는 32만 원선에 구입할 수 있다.

"앗싸! 1실점!" 일반 야구와는 달리 시각장애인 야구에서는 방어율이 높을수록, 그러니까 실점을 많이 하는 투수가 좋은 투수다.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직구와 변화구를 섞어 던질 필요가 없고 스트라이크와 볼도 없다. 그저 잘 칠 수 있도록 던지는 투수가 여기에선 류현진이다. 타자가 헛스윙을 하면 투수는 미안해진다(4스트라이크-3아웃제).

온 신경을 야구공의 비프음에 집중해 일단 타격에 성공하면, 역시 전자음을 내는 1루 베이스를 향해 힘껏 달린다. 수비수가 주자를 터치해서 아웃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주자가 베이스에 도착하기 전에 소리가 나는 공을 잡아낸 수비수가 손을 번쩍 들면 아웃이다.

야구교실 담당자인 정자익 씨는 "야구는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중 하나다. 중계를 들으며 생생한 현장을 느끼기도 하고 희미하게라도 보이는 경우에는 직접 야구장에 가서 응원을 하기도 한다"며 "이용자 분들이 행복해하실 때가 제일 보람이 크다"고 했다.
 

   
▲ 'SILOAM'이라고 적힌 유니폼은 지난해 고양원더스에서 기증해준 것으로 이날 처음 참여한 강인철 씨(맨 왼쪽)를 제외하고 모두 유니폼을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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