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세상 ] 아름다운세상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3년 08월 16일(금) 11:44
골목길마다 얽힌 아름다운 흔적들
복음의 황무지에 뿌려진 땀과 눈물 밟으며 그 길을 걷는다
부산 좌천동 골목길은 복음의 황무지였던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호주 선교사들의 애환이 물씬 서려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나 잠시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가파른 골목길을 오를 때면 초기 한번쯤 선교사들이 이곳에 뿌렸던 땀과 눈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만든다.
무더운 여름철, 오랫만에 부산을 찾은 기자는 역사신학자인 탁지일 교수와 함께 초기 선교지로 손꼽히는 부산 좌천동 골목길 기행에 나섰다.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그와 함께 좌천동 골목길에 얽힌 초기 호주 선교사들의 여러가지 아름다운 흔적들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부산 좌천동 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인 산복도로를 출발해 가파른 갈맷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오른쪽에 붉은 서양식 벽돌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몹시 비탈진 굽은 골목길 옆에 자리한 일신여학교 건물이다.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일뿐 아니라 3ㆍ1 독립운동의 진원지인 일신여학교 건물은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벽돌건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한다. 지난 2003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이 지금은 기념전시관과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버려진 여자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 시설로 출발한 일신여학교는 이후에 여성교육에 길이 남을 많은 업적을 세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업적 뒤에는 눈물로 여성교육에 기초를 놓았던 초기 호주 여자선교사들의 열정이 숨어 있었다. 대부분 미혼이었기에 호주 여선교사들은 이곳의 여성과 접촉이 쉬웠을 뿐 아니라 소외받고 있던 여성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탁 교수는 당시 여성교육에 앞장섰던 선교사들의 모습과 사용했던 교재들, 그리고 전시된 유물들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그리고 지난 1895년 처음 문을 연 일신여학교가 간직한 세 가지 역사적인 의미를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일신여학교는 건축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부산지역 유일의 서양식 벽돌건물이고 둘째, 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요람이며, 셋째, 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최초의 3ㆍ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라고.
그랬다. 부산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자주정신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3ㆍ1운동 독립시위가 처음 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가 일신여학교였다. 여교사들과 어린 여학생들은 밤새도록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좌천동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교사들과 학생들이 체포돼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실 한 켠엔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졸업반 김반수의 증언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태극기를 들고 3월 11일 밤 8시경 거리로 나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부르다 부르다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를 내어 불렀답니다. 그때는 여자로서 부끄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지 하는 일념 때문에 일본경찰에게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항의를 했답니다."
잠시 머물렀던 일신여학교 건물을 나오면서 기자는 당시에 이 건물 안에 숨어 태극기를 그리던 어린 여학생들의 모습과 거리를 뛰쳐나가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던 어린 여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라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다. 오늘도 이 골목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일신여학교를 바라보며 기자와 같은 생각을 떠올릴거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길을 중심으로 일신여학교 건너편 왼쪽에는 1890년 배위량(W.Baird) 선교사가 한옥 한 채를 짓고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출발한 부산진교회가 자리한다. 1900년 왕길지(G. Engel) 목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는 왕길지 선교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돼 있어 그가 이곳에서 흘렸던 땀과 눈물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초대 당회장 왕길지 선교사의 기념관이 있다.
좌천동 갈맷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가 왼쪽 골목길로 돌아서면,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지역 여성들에게 기독교 박애정신으로 의술을 베풀었던 대표적인 여성병원, 일신기독병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일신기독병원을 처음 찾은 기자는 최근 세상을 떠난 매혜란 선교사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신기독병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1910년 부산땅을 밟았던 매혜란(Helen Mackenzie) 선교사의 아버지 맥킨지(Mackenzie)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한센씨병 환자를 돌보는 사역을 펼쳤던 그는 1938년 은퇴후 귀국한 후에 1956년 호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펼치던 중에 태어난 두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떠나기 4년전인 1953년 부산으로 건너와 이곳에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것.
이처럼 일신부인병원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두 딸, 매혜란(Helen Mackenzie)과 매혜영(Catherine Mackenzie) 선교사가 1953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지역 여성들에게 기독교 박애정신으로 의술을 베풀던 대표적인 여성병원이다. 당시에 부산진교회가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천막에서 침대 10개를 설치하고 일신부인병원으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현재 병원 내에는 맥켄지역사관이 있어 한국전쟁 당시의 산모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매혜란 선교사는 세상을 떠나기전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바라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돈 없이 병원에 들어오는 환자가 있다면 도와주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 정신으로 의료선교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이 첫 발을 내디딘 부산.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복음의 씨앗을 뿌린 역사의 땅인 부산. 선교사들이 흘렸던 땀과 눈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좌천동 골몰길을 걷노라면, 이 땅에 남긴 그들의 선교열정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만든다. 요즘들어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자리들이 하나둘씩 유적지로 가꿔지고 있어 다음세대에 남길 유산이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큰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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