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 '조지송 목사'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 '조지송 목사'

[ 아름다운세상 ] 아름다운세상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3년 07월 19일(금) 14:29

"암울하던 시절, 영등포産宣이 '사람답게 사는 법' 가르쳤지"
"나는 주인공 아냐, 모두가 함께 한 일 …모든 역경 물리치고 산업선교 지탱해 온 이들의 노고 기억해주길"
 
 

   
 

"나를 주인공으로 신문에 낼 생각하지마. 1980년대 초에 현장을 떠나 30년이 지났는데 지금 왜 나를 다루려고 해. 내가 크게 나가면 우리가 한 일이 내가 한 일이 되어버리잖아. 모두 함께 한 일이라고. 나는 그 중에 가장 말석에 있어야 할 사람이야. 겸손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니까 오늘 취재는 취소해."
 
난감했다. 기자는 "신문 게재가 확정된 것이 아니니 오늘은 말씀만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처음 방문할 때부터 '조지송 목사와 영등포산업선교회 사람들'이라는 콘셉트로 기획이 확정되어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손은정 목사에게는 미리 귀띔을 했다. "뭐, 기획는 확정된 건데…신문 나간 다음 목사님께 혼나야지요."
 
지난 18일. 영등포산업선교회 실무자 및 회원들 3명이 성남시 판교동에 위치한 초대 총무 조지송 목사의 자택을 찾았다. 조 목사가 현장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영등포산선 사람들은 최근에도 조 목사의 자택을 방문해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눈다. 물론, 방문 목적에는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조지송 목사 평전'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사진과 그의 그림 등을 스캔하고 정리하기 위함도 있지만 방문시간의 대부분은 유쾌한 대화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이날 조 목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영등포산선 총무 손은정 목사, 영등포산선 내 신용협동조합인 다람쥐회 회장 박점순 권사(성문밖교회), 홍윤경 부장(영등포산선 노동선교부).
 
이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 목사의 안부부터 확인한다. 조 목사는 5년전 파킨슨병이 발병해 현재 거동이 불편하다. 여기에 황반변성 증상까지 생겨 글을 읽기도 어려운 상태다.
 
옆에 앉은 손은정 목사는 연신 조 목사의 떨리는 손과 발을 주무른다. 마치 친정집을 찾은 막내딸 같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영등포산선, 그리고 실무자들은 조 목사에게는 자식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했다. 조 목사의 팔순잔치를 영등포산선에서 주관해 가졌다.
 
 

   
 


"우리 목사님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너무 싫어하세요. 작년 팔순잔치 때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노회나 총회 쪽에도 알리지 못했어요. 1970년대에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과 영등포산선, 일하는예수회, 성문밖교회(영등포산선 내 교회) 교인들 정도만 모시고 잔치를 했죠." 손 총무의 말이다.
 
박점순 권사는 영등포산선 내 신협인 다람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조언을 얻기에 바쁘다. 박 권사는 신협의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일을 하면서 속상하고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기도 한다. 조 목사는 보상도 별로 없는 일에 헌신하는 박 권사의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래도 결국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사역자가 희생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라는 말이다.
 
박 권사는 1974년부터 영등포산선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때 당시 남영나이론이라는 회사의 여직공이었고 조 목사가 총무였었다.
 
"그때는 12시간씩 노동하는 극심한 피곤함 가운데서도 시간만 나면 영등포산선에 왔었죠. 당시 우리 여직공들은 삶에 대한 희망이 없었어요. 뭔가를 찾고 싶은데 그 뭔가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영등포산선밖에 없었어요. 공허함을 메우려고 학원도 다녀보고 야학도 해봤는데 노동자들의 삶에 만족을 주지는 못했죠. 그런데 영등포산선을 만난 이후로는 삶이 달라졌죠. 이전과는 다른 시선,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보게 된 거예요."
 
박 권사의 말에 조 목사가 말을 이었다.
 
"당시 영등포산선이 노동자들에게 노동문제만 가르친 게 아니야. 대학교와 학원을 견학 시키고 아는 극장 사장에게 얘기해서 프로그램 바뀔 때마다 표를 뭉텅이로 받아서 영화도 많이 봤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려고 했어. 그리고 참 별거 별거 다 가르쳤지. 한문, 노래, 신문읽기, 요리강습, 뜨개질, 꽃꽂이, 건강관리, 육아교육, 이성관계, 인간관계, 종교생활 등을 비롯해서 아, '멋이란 무엇인가' 이런 강의까지도 했다고. 왜 그랬냐 하면 종합적으로 인격을 키우려고 했던거야."
 
이날 방문에서 기자는 조 목사가 그림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병으로 인해 미술작업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그는 최근에도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손 총무가 키보드연주를 부탁하자 건반을 누를 수가 없다며 사양했지만 이들 증언에 따르면 연주솜씨도 뛰어나고 작곡까지 한다고.
 
"옛날 얘기를 하면 감정이 너무 앞서. 눈물이 먼저 나와. 그때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정말 밤낮 안가리고 뛰었어. 당시 노동자들은 얼마나 큰 아픔을 겪었는지 몰라.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산업선교를 지탱해온 노동자들의 피와 땀, 실무자들의 노고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조지송 목사의 목소리는 읊조리듯 작고 연약했지만 그 말의 무게는 천근 쇳덩이보다도 무겁게 가슴에 와닿았다.

조지송 목사는?
 
영등포산업선교회 초대 총무 지내
"현장 떠난지 30년 지났어도 아직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조지송 목사(82세)는 1963년 11월 경기노회 파송을 받은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다. 그는 이듬해인 1964년 2월 영등포교회에서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원회' 주관으로 취임예배를 드리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초기에는 공장을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는 전도활동에 주력했지만 너무나 열악한 근무환경과 부당한 노동력 착취, 임금체불 등 인권유린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고, 이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노동현장을 바꾸기 위한 이른바 '산업선교'를 전개했다.
 
유신 이전 비교적 자유롭던 산업선교 활동을 전개해오던 그는 1972년 국가보안 특별조치법 발동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소그룹 조직과 운영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는 식으로 운동을 지속했다. 이 소그룹 조직 활동으로 인해 영등포산업선교회는 70년대를 통틀어 가장 효과적인 노동운동을 펼쳤으며, 조 목사 개인적으로도 당시의 소그룹 모임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가장 교회다운 모습의 교회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로 한국사에도 정통한 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 '현대사 - 한국의 양지'에서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기관인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리에 대해 알도록 힘써 왔다. 한국의 지독한 암흑의 시기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진리와 사회적 정의의 횃불을 지켜왔다"고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조 목사는 1982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산업선교 현장을 떠난 후 85년부터 충북 청원군 옥화리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전원생활을 하던 조 목사는 5년 전 파킨슨병이 발병해 치료와 건강관리를 위해 현재의 거주지인 성남시 판교동으로 이주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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