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명소 길

대구의 명소 길

[ 아름다운세상 ] 대구의 명소 길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2년 11월 05일(월) 14:17
[아름다운 세상]

길 속에 숨어있는 낯선 고즈넉함과의 조우
대구 근대화골목에서 만나는 나라와 민족, 교회 사랑했던 숨결들

   

【대구광역시=장창일차장】 전국적으로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걷기에 좋은 길들이 여러 지방에서 발굴된 것은 이 열풍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과 북한산의 둘레길 등을 필두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명소를 발굴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길'을 발굴하는 노력이 확산되면서 자연 속을 걷는 기존의 개념과는 다른 조금은 색다른 길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대구광역시도 문화와 역사 속을 걷는 명품 거리를 조성했다. '대구 중구 근대골목'이 그 주인공. 대구시 중구에만 모두 5개의 골목길이 조성됐다. 그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라면 대구동산병원에서 출발해 대구제일교회와 선교사들의 사택, 3ㆍ1 만세운동 길로 이어지는 2코스를 꼭 찾아보자. 이 길의 끝자락에는 저항문학으로 대변되는 이상화 선생의 고택도 자리 잡고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깊어가는 가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대구 시내는 노랗고, 붉은 빛으로 뒤덮인 은행나무의 군무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온몸 가득 품고 있는 은행나무 속을 걸어가다 보면 어느덧 대구의 근대사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기자가 출발한 곳은 대구동산병원이었다. 1899년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이 병원은 대구의 희노애락을 목도(目睹)한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설립된 지 1백년이 훨씬 지난 병원의 초입은 여느 종합병원과 마찬가지로 분주했지만 병원을 가로질러 언덕 위로 오르니 좀 전의 복잡함은 온데 간데 없고 낯선 고즈넉함이 펼쳐졌다. 길바닥에 은행잎이 떨어져 있어 본격적으로 걷는 재미가 시작되는 곳도 바로 동산병원의 끝자락 언덕에서 부터다.

   
▲1910년대 건축물로 현재는 선교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스윗즈선교사 사택.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1910년대 건축물인 선교사 스윗즈의 주택(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24호)과 선교사 챔니스의 주택(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25호), 그리고 선교사 블레어의 주택(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붉은 벽돌을 쌓아 지은 이색적인 모습의 양옥들은 1999년 10월, 동산병원이 설립 1백주년을 맞아 각각 선교박물관과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 시켰다. 건물 자체만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높은 이 주택들을 박물관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몰라도 안성맞춤이라는 옛말이 썩 잘 어울린다.

   
▲의료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챔니스선교사 사택.

그 집 앞 한 구석에 서 있는 작은 사과나무는 대구시민들에게 선교사들이 전달한 소중한 선물이다.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대구동산병원이 개원할 당시 미국 미주리주에서 들여온 대구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 동산병원 초대 병원장인 의료선교사 존슨박사가 심은 이 나무엔 여전히 탐스러운 사과가 달려있다. 자두만한 크기의 빨갛고 탐스러운 사과를 쳐다보는 이들 대다수가 '맛있겠다'는 반응이다. '하나 따먹어 볼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지만, 나무는 인간의 탐욕을 애초에 거두어 가려고 작정을 했는지 그 탐스런 열매들을 손이 닿지 않는 저 멀리, 나무의 끝에 약 올리듯 대롱대롱 달아뒀다.

사과나무를 보며 '헛꿈'을 꾸기도 잠시. 유치원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따라가 봤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나게 되는 골목. 그리고도 내리막길. 그 길로 가는 중 왼편에는 대구제일교회가 있고 저 멀리에는 계산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이 골목이 바로 3ㆍ1 만세운동이 시작됐던 역사의 현장이다. 그 옛날 일제 치하에서 목숨을 걸기로 작정한 대구시민들이 양지바른 언덕에 모여 독립을 위한 의지를 다지고 품 안에 넣어둔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외쳤을 걸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동이 울컥 올라온다. 그 뜨겁던 열정을 생각이나 해 봤는지 방금 그 꼬마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까르르 웃으며 우르르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골목의 양 옆으로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담쟁이 넝쿨, 엉켜있는 넝쿨의 모양이 험난했던 우리 현대사를 상징하는 듯 해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의 초입, 언덕 위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던 계산성당이 오히려 길의 끝에 서니 더 멀어져 보인다.

차도를 두 개 건너서 도착한 계산성당의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아까 봤던 꼬마들이 갖가지 포즈를 잡으며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이 길이 바로 또 다른 역사의 현장으로 향하는 입구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년, 서슬퍼렇던 일제 치하의 그 시절 희망과 분노를 담은 시를 써냈던 시인 이상화. 43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애타는 절규를 시에 담아낸 이상화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조국의 참담한 현실과, 살아남기 위해 굴종을 숙명으로 여기고 변절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슬픔을 자신의 온 삶을 통해 기록해 냈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위암으로 숨진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

대구 중구 근대골목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이상화의 고택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도시개발로 사라질 뻔 했던 곳,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대구시민들은 십시일반 정성을 모았고 마침내 복원한 것이 지난 2008년 8월의 일이었다. 시인은 이곳에서 1943년 4월 25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이상화 선생의 고택 곁에는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였던 서상돈 선생의 고택도 보존돼 있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했던 서상돈은 1907년 대구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해 발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몇 채의 고택들과 이 유산을 후대에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박물관. 그리고 백년은 족히 넘었을 고택들을 빙 둘러싸고 있는 최신식 아파트가 연출하는 부조화. 하지만 햇살 좋은 그 가을의 어느 날, 그 길의 한 중간 이상화 시인의 고택 마당에 서서 조용히 묵상에 잠겨본다. 그 조용한 시간, 길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마치 이상화 시인이 살던 그 시절로 다녀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 좋은 상상들이야말로 길을 걷는 이들에게 보너스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닐까. 대구를 찾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이런 상상 속에 빠져 들수 있으니 편한 복장, 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보면 어떨까. 초겨울로 향해 내달리는 이 계절, 깊은 가을의 풍미를 만끽할 수 있는 길로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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