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시오"

"부디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시오"

[ 아름다운세상 ] 한석진목사 후손 대대로 고이 간직해온 유품, 총회에 기증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1년 06월 14일(화) 11:53

 

   
▲ 한석진목사의 후손들이 유품 기증식에 함께 자리했다. 왼쪽 세사람은 3녀 한순제 씨의 후손, 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한화심 씨 곁으로 3남 한필제씨 후손들.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것이 아주 어렸을 때인데 아마도 평북 선천이었을 거에요. 원래는 키가 그렇게 큰 분이 아니신데도 두루마리를 입으셔서 그런지 키가 아주 크게 느껴졌어요. 중국에 다녀오시는 길에 들렸다고 하셨는데 굵은 당면을 사오셨었어요. 한국 당면은 가늘잖아요. 굵은 당면으로 어머니가 갈비탕을 끓여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요."

지난달 12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총회장실에서 열린 한석진목사의 유품 기증식. 82세의 할머니가 된 손녀 한화심씨(한석진목사의 3남 한필제씨의 장녀)가 천진난만한 소녀의 얼굴 빛을 띄며 할아버지 한석진목사를 회고하기 시작했다.

한 목사는 슬하에 3남 3녀를 뒀다. 지난해 말 처음 유품 기증의사를 밝힌 후손들은 "한국교회가 할아버지를 기억했으면 한다"며 사진 2점, 전기 2권과 병풍 1점을 총회에 보내왔다. 이중 병풍은 한석진목사가 직접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표로 만들어져있고 보관 상태도 좋다. 귀중한 유품인만큼 기증을 결정하기 전 가족들간 회의도 거쳤다.

   
▲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1회 독노회(7인 목사의 안수식).
후손들 대부분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막내딸이 올해초 1백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현재 한석진목사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후손은 한화심씨와 장녀의 아들인 신한영씨(82세)만이 남아있다. 기증식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손녀의 생생한 증언에 귀를 쫑긋 기울이게 됐던 이유다.

가는 당면처럼 가녀린 목소리로, 끊어질듯 끊어질듯 술술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풀어낸 그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하나 소개했다. "6학년 때 아버지가 은행 일을 그만두셔서 서울로 올라와 할아버지와 같이 살게 됐는데 당인리였을 거에요. 밤낮으로 손님이 끊이질 않았죠. 요즘 사람들은 당인리를 잘 모르는데 그때는 수도가 없어서 김장 때면 한강에 가서 다 씻고 김장을 했어요. 거기서 빨래를 하고 그 물로 밥을 지어서 먹기도 했죠. 할아버지가 건강이 좋으셨을 때는 손수 부엌에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듯 다 지휘하셨어요. 날 더러는 저쪽에 가있으라고 하시고…(웃음). 13살 때인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릴 때라 잘 기억은 안나요."

손녀의 기억대로 한 목사는 금강산기독교수양관 건립을 끝으로 서울 마포구 당인리 자택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며 찾아오는 후배 목사들에게 친히 냉면을 뽑아 대접하곤 했다. 물론 찾아오는 이들의 손을 잡고 "부디 싸우지 말고 주 안에서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시오"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한석진목사가 직접 수집한 우표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병풍.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1층 사료관에 전시돼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한석진목사는 가정에서도 강직한 성품 그대로 자녀들에게 엄격히 신앙교육을 실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아버지가 일요일에는 바깥에 못나가고 성경만 읽어야 했다고 하셨어요. 하루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학교에서 신사참배 하냐고 물으시더라구요. 그래서 한다고 했더니 단호히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한 목사의 이러한 철저한 신앙교육은 일시적인 부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사연인즉, 3남 한필제씨는 한석진목사가 죽은 후 한동안 무교회주의에 빠졌다가 나중에서야 교회로 돌아왔다고 한다.

후손들은 대대로 고이 보관해오던 유품을 기증하고도 이날 총회에 역사보존기금을 남기고 떠났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하신데 천만분의 일도 못되는 사람이라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이들은 생김새 뿐 아니라 삶의 실천으로, 자신들이 한석진목사의 후손임을 증명해내고 있었다. 피를 섞은 혈육은 아니지만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는 과연 '몇분의 일' 만큼 그의 정신을 계승해내고 있을까. 

 
"마 목사! 속히 이 나라를 떠나시오"
   
   
▲ 한석진목사, 1927년 회갑기념 사진.
"마 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 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한국 장로교회 최초 7인 목사 중 한 사람인 한석진목사에게는 '토착교회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조국의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평생을 헌신해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직언한 그의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3남 한필제씨의 의뢰로 한석진목사의 전기 '나라의 독립 교회의 독립(1988년, 기독교문사 펴냄)'을 저술한 바 있는 이덕주교수(감신대)는 "한석진목사님의 한가지 목회이념을 추출하자면 '한국인에 의한 한국 기독교'라 할 수 있다"며 평양 장대현교회를 지을 때 선교사들의 자금 지원을 거절하고 건축을 추진시킨 점이나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 제일교회, 금강산기독교수양관까지 한국인의 힘으로 지은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했다.
 한석진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립시 초대 서기이기도 했다. 1907년 9월 19일 노회 마지막날 길선주목사가 낭독하고 회원 전체의 동의로 채택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로회 회록 셔문'도 한 목사가 작성한 것으로 이는 한국 장로교회의 창설 과정과 의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 기독교'를 향한 꿈의 씨앗이 뿌려진지 1백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교회는 전세계 선교사 파송 2위를 자랑하는 온전한 자립교회로 성장했다. 현재 한석진목사는 영락공원묘지에 잠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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