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적 무신론자"

"유신론적 무신론자"

[ 논설위원칼럼 ]

김대동 목사
2024년 03월 18일(월) 00:05
신앙은 자각(自覺)이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깨닫고 자각해야 삶의 변화로 나아갈 수가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자각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각이고, 자각해야 몸부림이라도 칠 수 있다.

시편 14편은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진 다윗이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를 교훈하는 지혜시편이다. 그런데 시편 53편을 찾아 비교하며 읽어 보면 놀랍게도 이 두 시편은 거의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지 토씨 정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똑같다. 그렇다면 시편 안에 왜 거의 똑같은 시편이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이 두 시편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14편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엘로힘)'으로 부르기도 하고, '여호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53편에서는 오직 '엘로힘'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차이를 가지고 학자들은 '엘로힘'만 사용하고 있는 53편은 이방인들을 향한 말씀이고, '엘로힘'과 함께 고유명사인 '여호와'까지 사용하고 있는 14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교훈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다윗의 14편은 사실은 굉장히 이상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종교사회이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혜시편을 써서 '하나님이 없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종교사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자는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이름을 붙여보았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고는 있지만 실상 그 생활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는데, 그들은 바로 '유신론적 무신론자'이다.

'유신론적 무신론자'라는 이 표현은 우리 마음속에 큰 아픔을 준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얼마든지 유신론적 무신론자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신앙과 교회 밖의 신앙이 너무나 다른 표면적인 그리스도인,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남들에게 보이려고 겉모양만 화려하게 꾸미는 외식적인 그리스도인,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영적 가르침은 무시하고 오직 세상의 방식대로만 살아가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양심에 화인 맞은 그리스도인,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 겸손히 자기를 낮출 줄 모르고 끊임없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한 그리스도인, 교회는 다니면서도 거짓말, 간음, 분쟁, 미움, 횡령, 뇌물, 부정직, 이간질을 밥 먹듯이 하는 죄악에 빠진 그리스도인, 이들은 모두가 다 유신론적 무신론자들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유신론적 무신론자들에게 7가지 화를 발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다. 신조어 중에 '나토족'(NATO)이란 말이 있다. 'No Action, Talking Only'란 말인데, 행동은 없고 말뿐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난맥상은 결국은 유신론적 무신론자의 문제이다. 각 교회 안에, 교단 정치 속에 유신론적 무신론자들이 너무나 많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닌지 깊이 통탄한다. 결국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유신론적 무신론자의 모습을 탈피하는 데 달려 있다. 자각해야 한다. 진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김대동 목사 / 분당구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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