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와 복의 통로

카리스마와 복의 통로

[ 디지털시대의효이야기 ]

박철호 목사
2024년 03월 27일(수) 15:42
유교의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자효쌍친락가화만사성(子孝雙親樂家和萬事成)'이라고 하여 '효하는 자녀는 부모를 기뻐하게 하니 온 가족이 화목하고 하는 일이 잘 된다'는 말이 있다. 결국 효가 만사를 형통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유교도 효가 복으로 연결됨을 분명히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의 효복사상은 기독교의 효복사상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있다. 즉 유교의 효복사상에는 기독교의 십계명이 내재하는 장수에 관한 내용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효복사상은 앞에서 언급한 장수에 초점을 둔 도교의 효복사상이나 형통에 초점을 둔 유교의 효복사상보다 더 강화된 효복사상을 내재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효복사상은 '복의 통로'로서 부모 공경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효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의 통로'에 대한 개념 파악이 전제된다.

성경에서 '복의 통로'라는 말은 창 12장 1절~3절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정착 시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본래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지방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고향을 떠나 소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이국이나 타지방으로 갈 때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곳에 거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방인에 대한 배척은 그 어느 곳에서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다. 그 약속의 내용은 창 12장 3절에 보다시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통로)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이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따라 감히 가나안에 정착을 시도하게 된다. 복의 통로자 또는 복의 근원자(엄격히 말해 '복의 근원자'는 하나님이시기에 '복의 통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로서 아브라함을 잘 대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효와 복을 연결하는 중요한 메카니즘을 제공한다.

왜 그런가? 복의 통로자로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기독교의 효의 관점에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론을 먼저 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베버가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그 명백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류 역사에는 카리스마(Charisma)적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카리스마의 카리스(Charis)는 복이라는 의미이고 마(ma)는 그 복이 드러난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복의 통로자를 이 땅에 내려보내 주시기 때문에 복의 통로자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카리스마를 가진 카리스마적 존재 곁에는 지지자들이 모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카리스마적 존재에 대한 지지를 통해 복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카리스마적 존재는 흔히 정치 경제나 사회적으로 대중을 이끄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도 복의 통로자로서 얼마든지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이런 복의 통로자로서 카리스마적 존재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카리스마적 존재를 만나 그 사람을 축복하고(결코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통해 복을 받게 한 것이다. 카리스마적 존재를 축복하면 카리스마 존재가 축복을 받는 여부와 상관없이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의 통로와 연관된 카리스마 현상을 통해 기독교 효복사상의 부모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박철호 목사 / 오직예수교회·기독교효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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