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위해 희생한 선배들 기억하자"

"민족 위해 희생한 선배들 기억하자"

3.1절에 만난 사람- 독립운동가 최영돈의 후손 최상도 목사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24년 02월 26일(월) 09:09
1919년 3월24일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시위사건 판결문.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24일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리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진명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23세 청년 최영돈은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우리 지역에서만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는게 부끄럽다"면서 김태연 허철 김종수 등과 은창서의 집에서 만나 독립운동을 거사하기로 작정했다.

그날 오후 4시. 최영돈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마을 근처의 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이날의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4월 3일 4일, 6일 마을 사람들은 들풀처럼 일어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최영돈을 비롯한 시위 가담자 모두 체포됐다. 최영돈은 대구지방법원 김천시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피고들은 신문지 기타에 의하여 조선 내 각 지방에서 조선인이 조선독립만세라 외치고 있는 사실을 들어 알고, 유독 자신의 지방에 그 이 없다는 것이 조선의 치욕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실행할 방법으로 대정 8년(1919년) 3월 24일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은창서의 집에서 협의를 마치고 같은 날 오후 4시경 같은 마을 뒷산에서 함께 조선독립만세라 삼창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당 공정에서 피고의 그러한 내용이 자백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피고의 소위는 각 보안법 제7조에 해당하므로 그 징역형을 선택하고 피고들을 각 징역 3월에 처할 것이나 정상에 의하여 조선태형령 제 1조 제4조를 적용하여 각 주문과 같이 태형에 처할 것이다."

살이 터지고 녹아내렸다. 매를 맞다가 몇번을 기절했고, 깨어나면 다시 또 매를 맞았다. 엉덩이는 피가 흥건했고 뼈는 뭉그러졌다. 얼마나 맞았는지 누군가의 등에 업혀 나오는 그는 퉁퉁부어 그야말로 '반송장'이 되었다.

태형은 3.1운동 당시 '태 90에 죽지 않으면 폐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모질고 잔혹한 고문이었다. 최영돈은 이날의 고문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더욱 솟구쳤다.

일제의 서슬퍼런 감시와 압제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대담하게 맞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모집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알렸다. 송명옥 장이석 김종수 등의 애국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도록 주선했다. 미국 의원단 내한과 워싱턴 국제회의를 앞두고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군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 했다.

그리스도인에게 독립운동은 나라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고 자기 희생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순종의 마음일 것이다. 독립운동가 최영돈을 비롯해 '그 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잊혀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지역교회에서 조사로 섬기면서 복음으로 민족에 희망을 전해온 최영돈은 목회에 뜻을 품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경남노회 제18회 노회록에 신학교 입학 허락을 받았지만 졸업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혼란과 핍박의 시대 고향에 남아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부채감'으로 남은 최영돈은 마지막 순간 아들에게 "목회자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결국은 손자인 최상도 목사(호남신대 교수)가 조부의 한을 풀어주었다.

최 교수는 "할아버지처럼 목회자로 살고자 했지만 시대적 환경으로 고향에 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을 것"이라면서 "평양신학교 설립초기부터 최소한 해방전까지 입학생과 졸업생을 비교해 그들의 행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 신앙의 사회화를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교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특히 최 교수는 일반 사회에서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을 교회 직분을 빼고 이름만 기록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전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동기에 분명히 신앙적인 이유가 작동했을텐데 그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교회 직분을 찾는 작업도 한국교회가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참담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목숨 바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겨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신앙의 선배들이 있다. 기꺼이 조국의 그림자가 된 숱한 무명의 선배들. 3.1운동 105주년의 해에 그들을 추모하며 기억하는 것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최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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