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김필례 이야기

해방 후 김필례 이야기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지역 여전도회51

한국기독공보
2024년 01월 18일(목) 15:33
김필례의 남편 최영욱은 해방 후 광주 사회에서 폭넓은 지도력을 발휘하던 김천배 선생의 양보와 추천을 받아 군정시기 2년간에 걸쳐 전라남도 도지사를 맡기도 했다.

최영욱은 의사의 신분이었지만 당시 광주YMCA회장도 맡았다. 그리고 그의 이복형 최흥종은 김구로부터 해방 이후의 국정에 함께 참여하자는 끈질긴 구애를 받고 있던 터였다. 아무런 일거리도 없던 광주천을 떠돌던 어린 소년이 윌슨 의사의 보호 아래 제중원에서 일하고 세브란스에 입학해 날개를 단 셈이었다. 그는 광주 제중원에서 일하던 중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석의원이 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그 무렵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원과의 사이에 혼외자식을 두기도 했다. 그 간호원을 대학동기가 개업하던 진남포로 보내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필례가 여덟 살 나이의 여식을 데려다 입적시키기도 했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남편이 부인 몰래 낳은 자식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첫 아들을 비명에 보내고 입양시킨 이래 두 번째 가정문제로 김필례의 장부다운 포부와 대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이 1942년도 도마리아 선교사를 찾아온 최 박사가 어떤 신앙의 변심이 있었던지 그가 요즈음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는 평생을 선교사들과 더불어 일했고 그들의 도움까지 얻어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지원받았다. 그랬던 그가 교회를 등졌다는 사실은 부인 김필례의 자존심을 뒤흔들고 억장이 무너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남편의 그러한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김필례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도마리아 양이 커밍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플로렌스 양이 최 부인에게 보내는 쪽지에 의사 최 씨(김필례의 남편)가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9월 25일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감옥에는 의사 최 씨와 이야기를 나눈 세 명 의 크리스찬이 있었는데, 그들은 의사 최 씨가 회개하고 진정한 크리스찬으로서의 생을 마감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의사 최 씨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플로렌스가 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다녀왔습니다." (1950년 10월22일 유화례(Florence Root) 선교사가 보낸 편지 글 가운데)

공산 치하에서 남편의 갑작스런 부고와 상실은 김필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같은 해 6월 초에 전국여전도회장에 피선된 김필례가 미국 여전도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넌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었다.

전란에 휩싸인 조국, 아버지를 비명에 보냈을 두 자녀에 대한 황망함, 회장직을 맡자마자 건너온 미국에서 당면한 전쟁으로 밑바닥부터 와해된 여전도회와 정신 여학교 등등, 김필례가 편히 발 뻗고 잠든 세월보다는 무릎 꿇고 기도하며 눈물로 지새운 날들이 많았다. 당시 그녀는 YWCA의 협력을 받아 시카고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미국 정부가 나서서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김필례에게 당시 미국으로 피신해 와 있던 선교사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지역 교회에 사발통문을 보내 한국의 어려운 형편을 알리고 김필례가 미국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미국 교회들이 그를 초청해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돕는 캠페인을 진행할 것을 하소연했다. 무려 19개 주의 미국교회들을 방문해 한국의 어려움에 기도를 요청하는 김필례의 진정성 있는 호소는 이듬해 7월 귀국 때까지 이어졌다.

김필례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미국 교회와 구제 기관에서 보내준 구호물자가 배편으로 도착해 기독교 세계봉사회(CWS) 사무실을 열어 가족과 집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한국으로 오는 배편을 이용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배편을 기다리는 동안 선교부의 여러 인사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김필례를 배웅하며 이런저런 모습으로 격려하고 도움을 주었다. 특히 김필례는 시편 121편의 말씀을 받고 이를 감격해 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데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전란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겸손하게 무릎 꿇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새롭게 일할 기회를 주었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던 1951년 7월, 전란 후에 피폐해진 한국사회와 교회를 재건하는 일이 여전도회의 새로운 사역으로 맡겨진 셈이다.

김필례는 어린 나이에 황해도 소래에서 서상륜, 서경조 형제와 더불어 큰 오빠 김윤방이 교회를 시작했다. 소래교회가 왕성하게 발전하자 이 교회를 발판으로 조선교회를 배우고자 했던 언더우드와 캐나다 선교부의 맥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소래교회에 와서 언어를 배우던 조지아나 휘팅이 세브란스 병원을 떠나 1900년에 남장로교 선교사 오웬과 결혼함으로 그가 광주로 교적을 옮기게 되자 평소 조지아나와 가깝게 지낸 어머니가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광주에는 목포 세관에 근무하던 남궁혁이 금정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남궁혁은 윤방 오라버니의 맏사위요, 필례에게는 손위 조카사위로 금정(광주제일교회)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고 평양신학을 마치면서 금정교회의 담임을 맡게 되었다. 프린스턴과 유니언 신학을 마치고 평양신학 교수로 부임했다. 소래를 떠난 김필례에게 있어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된 것이 평생지기요 배필인 최영욱 박사와 혼례를 치른 후 그가 광주에서 금정교회를 중심으로 벌린 야학과 여전도회, YWCA 등이 일어난 여성운동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수피아 재건 교장을 맡았다. 모교 정신학교의 교장으로 떠나던 시점까지 김필례의 의식과 헌신이 살아 숨 쉰 터전이었다. 광주가 있기에 김필례도 있었던 셈이다.

광주가 있었기에 윈스보로 여사도, 서서평 선교사도 만나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 여성들을 위한 헌신의 첫걸음도 떼어 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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