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3년 만!

딱 3년 만!

[ 땅끝편지 ] 멕시코 최남영 선교사

최남영 선교사
2024년 01월 10일(수) 14:55
선교 초기 멕시코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아즈텍 문명의 해신 피라미드
"딱 3년만 있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선교사 지원을 그토록 반대하시던 장인·장모님을 이 말로 설득하던 때가 1997년이었다. 애지중지 자란 무남독녀 외동딸이 전도사를 만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린 두 손녀까지 얻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크셨겠는가? 그런데 선교사로 나가다니….

어떤 말로도 설득이 안되다가 '딱 3년 만'이라는 말로 유예되어 멕시코 땅에 지내온 지 선교 27년차가 됐다. 원치 않은 불효자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아픈 사연이다. 이제 천국에서나 용서를 구해야 할까. 선교의 시작은 혈육의 정을 넘어야 하는 첫 시련이고 고비다.

그런데 자랑할 일도 생겼다. 떠날 때 우리 부부, 두 딸로 네 식구였는 데 멕시코 선교지 생활 1년만에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어났다. 멕시코 선교둥이인 셈이다. 며느리에게 '아들 나면 교회 나가겠다'던 아버지 공언을 단번에 해결했으니 조금은 위안거리가 아닐까? 그 귀한 손주들 얼마나 안아보고 싶으셨을까. 그 대신 동사무소로 달려가 주민등록에 둘 씩이나 당당히 올리실 때 그 기분은 또 어떠셨을까? 그 일로 장성한 쌍둥이들 한국 병역문제 해결이 참 쉽지 않은 것은 모르시리라. 딱 3년이 지나던 때 왜 들어오지 않느냐고 긴 편지를 주셨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린 세월일까. 사정이 그렇지 못하게 되니 그러면 자식 인연을 끊겠다고 하시던 아버지 협박에 가슴 깊이 울었던 세월도 오래 전일이다.

참 신기하게 그토록 선교사 길을 반대하시던 장모님이 쌍둥이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방문하셨다. 몇 차례 오고 가신 후 아버님 먼저 떠나 보내시고 아예 선교지에서 함께 살게 되셨다. 23년간 우리 아이들 네 명을 키우시며 이름도 빛도 없는 무소속 선교사로 사신 셈이다. 협력 선교의 신모델이다. 아이들 장성해서 다 떠날 즈음에 그분도 90세 된 지난해 홀연히 떠나 가셨다.

딱 3년 만. 선교사로 살다가 돌아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7년 세월을 돌아보니 나를 이리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그러나 멕시코의 첫 정착은 참 쉽지 않았다. 1997년 여름 거창한 파송식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낯선 선교지 땅에서 겨우 한발 떼기도 서툰 즈음 생전 처음 들어보는 'IMF'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을 크게 흔들었다. 경제가 무너졌고 환율이 요동쳤다. 현장 선교사 사정은 아랑곳없이 총회는 선교비를 미화(불)에서 원화로 변경해 공문으로 하달됐다. 환율은 고공으로 치솟았고 현장에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렌트비 때문에 집을 이사했고 언어 수강비를 감당 못해 중도포기를 해야 했다. 어린 두 딸 학비까지 포기할 수 없어 생활비를 졸라맸고 때로는 선배 선교사 신세를 여러 번 지기도 했다. 누가 그럴 줄 알았을까.

그와 별개로 정착 1년간 파송교회와 밀월기간은 쉽지 않았고 소통은 갈수록 어려웠다. 오해는 쌓여가고 풀 길은 막막했다. 편지를 쓰고 팩스도 보내고 비싼 국제통화까지 해보았지만 해명은 요원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통곡했고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함께 울었다. 그 기간내내 여러 번 아팠다. 우리 부부의 말다툼이 잦아졌고 애들 보기 민망했다. 그 때 심정은 딱 3년이 아닌 딱 3개월 후 돌아가고 싶었다. 시련이었지만 돌아보니 선교지의 커다란 영적 싸움이었다.

우리가 첫 발을 디딘 멕시코 과달라하라 도시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선교지 정보에 너무 무지한 채 막연한 생각으로 와 본 도시는 상상보다 훨씬 크고 놀라웠다. 도시 곳곳마다 푸른 잔디로 잘 가꿔진 공원들 잘 관리된 큰 가로수 나무들이 도시 전체를 푸르름으로 채워진 양쪽 도로들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오랜 고풍 건물들이 현대식과 잘 어울러진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제일 중심지 도시 한 복판에 커다란 광장이 있고 광장 한가운데 교회(성당)를 중심으로 관공소 대극장 상가들이 잘 어울어진 분위기는 그림으로 본 유럽의 멋진 장면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늙은 부부가 손잡고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있다. 가족끼리 잔디밭에 편히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유치원에서 나온 아이들 삼삼오오 짝지어 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스럽던지! 80년대 90년대 한국 땅에서 나는 얼마나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아 왔는가. 사역과 학업 핑계로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몇 번이던가. 내가 지금 선교사가 되어 내 식구들과 이렇게 벤치에 편히 앉아도 되는가? 선교지에 와서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가. 거긴 다른 세상이었다.

그 이듬해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단 후 쌍태아라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그것은 우리 뜻이 아닌 하나님의 큰 위로 선물이었다. 네 식구가 일곱 식구로 늘어나자 먹고 사는 생활비가 늘 곱이었지만 행복한 고민일 뿐이다. 이제 25살 장성한 선교둥이들을 볼 때마다 그때 '딱 3개월 만', '딱 3년 만'을 되뇌이며 돌아가지 않은 게 얼마나 복된 은혜요 천만다행인가.



최남영 선교사

총회 파송 멕시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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