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고 매력적인 그녀, 김필례의 첫사랑

똑똑하고 매력적인 그녀, 김필례의 첫사랑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지역 여전도회 50

한국기독공보
2024년 01월 11일(목) 15:07
다음은 1917년 11월 윌슨 박사의 일기다.

최근 진료소는 몹시 바쁘게 돌아간다. 한 달에 1200건의 진료를 분주하게 한다. 조수 한 명이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지난해 병원업무를 그가 거의 도맡아서 했다.

10년 전 15살짜리 시골 소년을 길거리에서 진료소로 데려왔다. 그에게 상처 드레싱과 바닥 청소를 맡겼다. 그는 처음부터 일을 잘해서 곧 약국 서기도 맡았으며 4년 전에는 그를 유니언 메디칼 스쿨(세브란스 의 옛 이름)에 보냈는데 우등으로 졸업했다.

어제 아침엔 제가 마을로 돌아오자 그는 "수술이 5건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저는 옆에 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는 우선 20파운드 무게의 커다란 난소낭종을 제거하고 그 여성 환자의 목에서 종양도 제거했다. 이것은 항상 위험하고 어려운 수술이다. 그다음 수술엔 다리를 절단하고 골절을 치료하고 복부의 종기를 제거했다.

첫 번째 건만 제외하고 이 모든 것을 그가 혼자 처치했다. 그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며 이제 그는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는 올봄 아주 똑똑하고 매력적인 처녀와 결혼을 올린다. 그 둘은 모든 소식을 영어로 주고 받는다.

이들은 조선 사람들의 옛날 방식이 아닌 미국식으로 교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개 부모들이 아들을 위해 신부를 선택하는데 아주 어리거나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여자고 대부분은 결혼 전에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최 선생은 본인이 신부를 선택했고 편지도 나눴다. 미국의 보통 사람이 하듯 아주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교제를 한다. 지금 우리는 그를 위해 근사한 집을 짓고 있다. 그의 아내가 될 사람도 우리 병원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광주 기독병원에서 근무한 윌슨 의사의 1917년 일기 가운데 나오는 대목이다. 당시 세브란스를 졸업한 의사 최영욱이 황해도 소래처녀 김필례와 나누는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들은 1918년 서울에서 결혼하고 시댁이 있는 광주로 내려와 신접살림을 차렸다. 김필례는 수피아여학교에서 음악선생이었고, 당시에 흔치 않은 남녀 청년들로 찬양대를 조직해 직접 풍금을 치기도 했다. 오웬기념관에서 피아노 독주회도 열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신여성으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인 셈이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생겼다. 김필례 부부는 아들을 얻은 감사로 금정교회에 종탑을 신축하도록 감사헌금을 드렸다. 그러나 불행스럽게 아들 제화가 태어난 지 일 년이 채 안 돼 급성 뇌막염으로 죽고 만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그는 상심에 그치지 않고 광주 천변의 미장이 집 부인이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사내아이를 데려와 자식으로 입양했다. 당시로서는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이 사회 통념상 쉽지 않은 때였다.

아들을 잃고 상심한 남편은 1921년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김필례는 광주에서 서서평 선교사와 더불어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1920년, 광주를 방문한 미국 장로교 부인조력회 설립자 윈스보로 여사와의 만남은 김필례 인생에 부인조력회라는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쉐핑 선교사를 도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에 있는 조력회 본부로부터 전해져 오는 모든 문서를 번역해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규정을 만들고 서클 운영세칙을 만들었다.

1922년 12월, 서서평 선교사 댁에서 모인 광주 지역 부인조력회 조직에서 9명의 임원 가운데에서 그는 문서담당을 책임 맡아 일하게 된다. '문서사역'은 김필례가 여전도회 내에서 맡은 최초의 직임이다. 그 무렵 그는 광주와 서울에 YWCA를 조직하기도 한다. 그 이래로 학교 선생 하는 일과 부인조력회, YWCA는 김필례의 인생을 설명하는 큰 틀의 수식어가 됐다.

1925년 김필례는 조력회의 전적인 도움을 얻어 조지아주 아틀란타시에 있는 에그네스 스캇(Agnes Scott) 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부인조력회 입장에서는 해외에 첫 번째로 설 립된 부인조력회 차원의 인재 양성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뒀다.

1927년 남장로교 부인조력회 총회록에는 에그네스 스캇 대학에서의 2년 과정에 이어 뉴욕 컬럼비아 대학 사범학과에서 교육을 마친 김필례가 학위를 마치고 남편과 더불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공지가 나와 있다. 그리고 해마다 김필례의 학비와 여행비를 포함한 재정지원 금액이 낱낱이 보고됐다.

1927년 여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필례는 서서평과 더불어 작게는 금정교회 부인 조력회를 시작으로 광주와 전남지역의 조력회 회장으로 큰 몫을 했다. 아마 광주에서 시작된 부인 조력회와 YWCA 운동을 여성운동의 광맥이라고 한다면 이 수고의 정점에는 김필례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WCC, WSCF 등 세계적인 기독교 기관과의 연대로 지경을 넓혀 나갔다. 아마 1930년부터 해방이 된 1950년까지의 기간이 그녀의 삶에 가장 빛나는 족적을 남긴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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