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가 선교다

[ 주간논단 ]

박보경 교수
2023년 10월 23일(월) 10:00
아둘람의 집은 필자가 다윗의 아둘람 동굴에서 영감을 얻어 마련한 양평의 산속에 있는 작은 공간이다. 필자는 아둘람의 집을 '지친 영적 구도자를 위한 주막집 주모의 환대'를 경험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아둘람의 집은 세 자녀의 어머니이며, 여성목회자로서 신학교육에 참여하는 필자의 '나 다운' 방식의 선교 실천이다.

아둘람의 집에는 독대의 공간과 환대의 공간이 있다. 독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독대의 숙제를 통해서 한다. 즉, 과거의 자신과 만나고, 그 속에서 일하신 주님과 독대하며, 자신의 인생의 미래를 전망하며,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소명을 재확인한다. 환대자는 독대자들이 주님과의 독대를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여정을 곁에서 돕는다. 로뎀나무 아래서 좌절한 엘리야에게 천사가 그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것처럼 말이다. 독대자는 고요한 기도와 독대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숙제를 풀어내며, 조금씩 어두움의 시간을 통과한다. 마침내 독대자는 환대자로 거듭난다.

아둘람의 집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일꾼으로 부름받았으나, 정작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하나님의 일꾼들을 우선적으로 환대한다. 원래 필자가 아둘람의 집을 시작하게 된 것은 트럭운전하며 이민사회의 소외된 주변인들을 돌보다 과로로 일찍 죽음을 맞이한 남편 목회자의 삶을 기억하며 시작하였다. 남편처럼, 주변인 정체성을 지닌 하나님의 일꾼들을 지켜 보고, 이들을 위한 회복과 재충전의 공간을 꿈꾸게 되었다. 아둘람의 집은 바로 이러한 주변성의 현장에서 탄생하고, 주변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아둘람의 집에서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의 탄생을 경험하고 있다. 독대자와 환대자들이 모여 형성된 이 작은 에클레시아는 변화된 자신과 만나고, 재충전된 하나님의 일꾼들이 신적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둘람의 집을 방문한 한 사역자의 이야기를 여기 나누려고 한다. 김수정(가명)씨는 50대 초반에 코로나 펜데믹으로 어려워진 회사가 갑자기 그녀를 해고해버렸다. 한번도 직장없이 지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준비없이 갑자기 50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은퇴를 강제로 당하게 되면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릴뿐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이제 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우울감과 고독감에 사로잡혀있었던 2022년 여름에 우연히 필자와 만나게 되었다. 만남이 이어진 지 어느덧 1년이 되었고,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불안감과 우울감은 여전했다. 최근에 필자가 아둘람의 집을 개원한 후 그녀는 아둘람의 집에 독대자로 초청되었다. 며칠간의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 대화를 통한 성찰,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이어졌고, 그의 마음의 힘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독대의 시간을 통해서 막연한 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 자신의 어린시절의 경험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대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서서히 자신의 선교적 소명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독대자로서의 자신의 숙제를 조금씩 풀어가기 시작한 그녀는 또 다른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을 위한 환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사회초년생으로 직장 안에서의 상사와의 관계로 인해 고민하는 청년을 위한 상담을 제공한 것이다. 오랜 직장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따뜻하고 적합한 조언을 제공할 수 있었다. 독대자로 찾아온 그녀는 이제 타인을 향한 환대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아둘람의 집에서 며칠을 지낸 후 김수정 씨는 잊고 있었던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선교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준비 중이다. 여기 아둘람의 집을 찾아온 독대자는 이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항해를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

이 작은 경험을 통해서 필자는 하나님의 선교는 다양한 모습을 지녔고, 요즘같이 아픔이 만연한 시대에는 '환대'가 '선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바라기는 한국사회의 많은 곳에서 환대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박보경 교수(장신대·세계선교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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