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할 때 약해지기

[ 주간논단 ]

손화철 교수
2023년 10월 17일(화) 10:00
어린 시절 교회 생활의 추억 중 하나는 '회칙 타령'이다. 중고등부 학생회에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회칙이 있었는데 무슨 규정이 그렇게나 많은지 항상 토론거리가 넘쳐났다. 언젠가 한 번은 임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회가 정족수 미달로 취소되어 연기한 적도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같이 놀던 십대 친구 20여 명이 회의 정족수를 따지고 회칙 개정 때문에 다투던 일을 돌아보면 참 귀엽다. 그러나 별것 아닌 규칙을 지키려는 노력은 자기를 억누르고 공동체를 지키는 좋은 훈련이 되었다.

교회 안에는 규칙과 관련한 또 다른 가르침도 있었다. 다름 아닌 교회 밖의 규칙이나 법 때문에 손해를 본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였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해서 진학을 포기했던 사람, 입학을 위한 예비 소집일이나 중요한 시험이 주일이라 진학과 진로를 포기한 사람, 여름성경학교 봉사를 위해 휴가 일정을 잡았는데 일정을 바꾸라 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람 등등. 어린 마음에도 좀 지나치지 않은가 싶긴 했지만 신앙을 위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요즘에는 이런 경험도, 가르침도 거의 사라졌다.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도 많고 있어도 회칙을 운운하는 곳은 적을 것이다. 교인이 아니어도 주일에는 대부분 일을 하지 않으니 마찰이 생길 일이 적을뿐더러 교회에서 주일성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물론 시대와 형편을 따라 생기는 변화이니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규칙 일반과 관련해서 한국교회가 보이는 최근의 경향과 대조해 볼 필요는 있다. 어린 시절 지나치게 규칙을 운운해서일까,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에 스스로 엄격하지 않는 것 같다. 규칙을 어겨서 세상 법정에서 단죄를 받는 망신을 가볍게 여길 뿐 아니라 교회가 함께 내린 중요한 결정을 번복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는 적극적이어서 저항할 힘이 없는 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규칙을 만들어 낸다. 주어진 규칙에 순복하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것과 규칙을 가지고 남을 통제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싫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세상의 법과 규칙 때문에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 역시 과거와 다르다. 과거에 성도가 악법에 고통을 받고 손해를 감수한 이유는 저항하거나 법을 고칠 힘도 그럴 의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은 수도 많고 조직되어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세상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역설적이지만 강한 자일수록 희생과 손해가 억울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한국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 악법과 싸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민주 국가의 시민으로서 잘못을 지적하고 의견을 제출할 권리가 있지만 세상 법을 바꾸어 교회와 기독교인의 입장을 세우고 손해를 줄이려 투쟁하는 것은 자칫 과도해지기 쉽다. 신앙의 선조들처럼 악법에 희생 당하고 손해 보는 것을 연습하고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약할 때 강함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강할 때 약해져야 한다. 불편하고 귀찮아도 규칙을 지키며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도 규칙을 어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가진 힘을 함부로 쓰기보다 차라리 손해를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병든 자 약한 자를 섬겼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결국 그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규칙을 바꿀 힘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희생을 감수한다면 오늘 기독교인을 보는 한국 사회의 눈길도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다.



손화철교수/한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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