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에서 들은 음성

[ 주간논단 ]

김창근 목사
2023년 08월 29일(화) 09:51
은퇴 후 한라산 남단 산골짜기에서 2년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품같이 갖가지의 소리를 감춘 산골의 침묵은 깊은 회상으로 이끈다. 고요함 가운데 생각에 잠길 때 회상은 과거의 치유와 현재를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회상은 미래를 위한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월든 호수가에서 2년을 지내며 사색했던 소로는 내일의 특징은 시간의 경과만으로는 밝아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는 빛은 사실 우리에게는 어둠이라며, 눈을 뜰 때만 비로소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되새겨본다. 다시 도시로 돌아온 지금 오늘의 어둠을 마주하며 마음의 눈을 떠 찬란한 아침과 내일이 한국교회에 오기를 기다린다.

첫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 곳곳에는 '한국의 어둠, 속박, 우울로부터 한국의 빛, 꿈, 소망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기도가 들어있다. 그 후 정말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일구어내어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았다. 민족의 암울한 시대에 소망의 빛으로 부상했던 한국교회이다. 그러나 외적 성장과 부흥은 이루어냈지만 그만큼 내적 성장이 함께 하지 못했고 초심이 변질되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진정 한국교회가 추구할 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 성장이나 권력과 부와 명예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이 오늘의 교회에 만연된 듯한 부정적 인식이 사회에 깊이 깔려 있다. 세상 속에서 교회는 그 영향력과 권위를 상실하고 교회의 신뢰도가 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돌이켜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진리와 의를 자기에게 선포하고 이를 실천할 때 새 아침이 올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부흥 운동은 말씀과 함께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항상 수반되었다. 이런 개인의 영적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져 한반도 전역에 놀라운 사회변혁이 일어났다. 만연한 사회적 차별이 사라지고 불의하고 악한 사회 풍습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자연히 대부흥 운동은 일제 치하에서의 정치적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주는 원동력이 되었고,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을 살리는 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가능함을 확인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과 말씀으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은 교회에서 시작되어 세상 속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상실하고 영적 좌절과 침체 상태에 있다. 초대교회는 목숨 걸고 막강한 로마 제국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3백 년 만에 로마가 복음화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들이 세상을 바꾸기보다 현상 유지에 급급하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다. 누구든지 시대 정신에 영합하여 살면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힘을 상실하고 장벽에 부딪쳐 급격하게 추락한다. 이렇게 좌절한 사람들은 세상의 거대한 구조악에 매몰되고 위축되어 위대하고 강력한 힘을 작은 것으로 평가한다. 오직 성경적인 현실 인식만이 무엇이 가장 항구적인 힘이고 지배력인지 분별하여 진정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일어나게 한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불이 내리는 부흥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세벨의 위협과 박해를 두려워하여 광야로 도망하여 죽고자 했다. 하나님은 좌절과 영적인 침체에 빠진 엘리야를 영적 회복의 길로 호렙산에 오르게 하셨다. 호렙산에는 불과 폭풍과 지진과 같은 놀라운 현상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없었다. 선지자는 후에 깊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발견한다. 그는 왕들과 후계자를 안수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다. 모든 혼돈과 두려움의 극복은 사람의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 방식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데 있다.

산골짜기의 시간은 침묵 속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영적 흑암의 세력과 침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는 시간이다. 오늘의 교회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럴 때 현실을 실패와 절망의 코드로 읽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깨달아 다음 세대와 함께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가게 될 것이다.



김창근 목사/무학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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