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 회복을 위하여

[ 주간논단 ]

이종학 목사
2023년 05월 09일(화) 10:00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자 제자들은 마가의 집으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열흘째 되는 날 아침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그때 제자들은 신령한 권능을 얻고 즉시 거리와 골목으로 나아갔으며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전파하였는데 그 날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온 사람이 3천 명이나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예루살렘교회는 세계를 향하여 치유와 회복과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여갔다. 그런 측면에서 분열과 퇴보를 거듭하는 교회들의 문제는 분명하다. 성령의 권능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성령의 권능이 없는 곳에는 목회적 권위도 무너졌다. 도처에서 교역자의 파행을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각종 미디어에 사이비 교주의 악행이 도배된다. 신학교에 신학생이 없고 산 농어촌 교회 목회는 기피 종목이며 교회 개척이나 특별 사역을 준비하는 목회자도 거의 없다. 강단마다 말씀은 맥이 없고 영력은 떨어지고 물질과 교권과 쾌락에의 탐심은 강고하다. 신학이나 영성 혹은 교회사역 관련 세미나 참여는 기대할 수도 없다.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 사사가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 사람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오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8장에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국가와 백성을 지켜낸 기드온을 찾아와 크게 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들의 불평은 이러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홀대함은 어찜인가"(삿8:1). 그들은 실제 전쟁 때는 보이지 않다가 모든 것이 승리로 끝나자 그 공로를 나눠 갖고자 도발하고 있던 것이다.

성령의 권능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영적 싸움이나 주요정책이나 공적인 예배까지도 기꺼이 참여하지 않는다. 기본에 본이 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범사에 자기주장과 경험만을 펼치려 한다. 핑계와 비방을 입에 달고 살지만, 교회에는 관심 없고 주의 일도 책임지지 않는다. 교회 성패의 기준이 세속적이다 보니 교계 일꾼들 모인 곳에는 고급 차량이 즐비하고, 많은 부분의 연합사업이 고급 호텔이나 식당에서 이루어지고, 선교비 구제비 예산은 축소하되 명예와 권세 획득을 위한 교권 정치에는 헌금을 물 쓰듯이 쓴다.

성경은 욥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 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 것처럼 아침마다 번제를 드렸다. 평소에도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은 적이 없고 고아에게 아비처럼 대하였으며 의복이 없어 죽게 된 이웃을 양털로 입히고, 위하여 복을 빌던 사람이다(욥 31:17-22). 하루아침에 열 자녀가 죽고 가축이 불타고 재산을 빼앗기고 온몸이 병들었어도 원망치 않고 오히려 가족과 친구들의 조롱과 책망까지 달게 삼킨 사람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권위자였다. 그가 거리에 나설 때 소년은 머리를 숙이고 노인들은 일어섰으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귀인들 역시 소리를 금하였다. 논쟁으로 판결 못 한 재판은 욥의 한마디 제안으로 해결되었다(욥29:7-13).

마태복음 7장 28~29절의 말씀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 있는 자들과 같더라" 당시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가르침을 놀라워했다. 예수님의 권위는 스스로 내세워 대접받으려는 데 있지 않고, 그를 통해 나타난 능력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는 알지도 못하셨지만 병든 자를 고치고 형제의 발을 씻기며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바로 그 순결과 사랑이 뼈아픈 퇴보와 위기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이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만이 악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고 무너진 교회와 사역의 회복과 성숙을 위한 유일한 권능이시다.



이종학 목사 / 진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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