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광주 이일성경학교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⑬

한국기독공보
2023년 03월 03일(금) 18:05
'여전도회 하나님의 나팔수' p.96
노라복(Maie B. Knox) 부인이 서평과 인터뷰하면서 물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서평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조선 여성들 가운데서 미래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입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성경공부나 강습만으로는 여성들의 실제적이고 영적인 리더십을 계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운데 결혼한 여성과 나이든 처녀들을 위해 학교를 시작했고, 그들에게 보통과정의 일반교육과 수준 높은 성경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서평이 이일학교를 시작하면서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조력회를 통해 전도하고 결신한 믿음의 여성들을 세워 전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했다. 즉 믿는 이들마다 복음을 들고 이를 전하는 전사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막상 여성 성경공부만으로는 리더십이 세워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서평 자신이 공부한 뉴욕성경사범학교(현 뉴욕신학교)는 귀납적 방법의 성경교육으로 전문 지도자를 세우는 학교였다. 그런데 막상 그 원리를 한국 현장에 적용하려다보니 무리가 뒤따른 것이다. 리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욱 한국 여성 대부분이 무산대중 출신으로 빈곤과 무지한 상태가 하루아침에 개화되기 어려운 상태였다.

서서평은 한 손에 부인조력회, 다른 한 손에 여성들을 위한 성경전문학교를 구상했다. 물론 부인조력회도 자체적으로 성경공부 팀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지만, 지도력 향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여성 지도자를 길러야 하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장기적 대안으로 시작된 것이 이일성경학교였다.

평양에서 일반과정의 성경학교가 시작된 것은 1907년 5월에 전도부인을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개설된 평양여성 성경학원이 있다. 1930년까지 700명의 학생이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실제로 졸업은 184명에 그쳤다. 이러한 여성 성경공부는 황해도 재령이나 서울, 그리고 전라도 각 지역에도 있었다.

그러나 1920년에 시작된 이일학교와 같은 고등성경학원 기구는 북장로교 선교부 역시 1922년에 승인 받고 1923년 3월에 시작했다. 그들은 1926년 2월에 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개교 시작은 1920년의 이일학교가 먼저였고 첫 졸업생을 1927년 3월에 배출한 점에서, 1926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 평양 고등성경학원에 비해 한 해가 늦은 셈이다. 개교 시점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일학교가 한국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셈이다.

서평은 조선에 부임한 1912년 이래 제중원에서 여성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여성성경반을 가르치면서 의외로 문맹이 많은 것을 알고 여성들을 일깨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때만 해도 여성들의 교육 기회가 막혀 있어서 정규 교육을 받은 여성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한글마저 해독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무식한데 경제권도 없고, 여성들의 의식 자체도 낮았다.

사회구조적으로 잘못돼 있다고 판단한 그는 여성이 권리의식을 갖고 사회적인 직업을 가져야 함을 가르쳤다. 개화기 여성계몽을 위해 몸을 바쳤고, 여성교육에 앞장섰다. 갇혀있는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도, 복음을 전하는 데도 교육이 필요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조선의 기독교 여성들에게 주체의식을 갖도록 했다.

서평이 군산 구암병원에 근무할 때인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전주에 단기 성경학교를 개설해 1년에 1~3개월 과정으로 성경공부를 시키다가 점차 6개월 코스로 늘려갔다. 이것이 그가 전주에 여성을 위한 한예정 성경학교 설립과 연관되는 부분이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한 독립투사들을 돕고 공공연히 감옥을 방문함으로 일본 당국으로부터 거부반응을 받고 지내던 그가 신변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라 광주로 내려가 제중원 간호사로 일하는 한편 양림동 선교부지 내에 학교를 설립했다. 부모의 반대로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여인들,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는 여인들, 결혼은 했으나 아이가 없어 박대당한 여인들,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 학령이 초과한 여인 등 불우하고 기회를 놓친 다양한 계층의 여인을 상대로 한 학교였다. 이 학교가 바로 1920년 서평에 의해 시작된 여성들을 위한 이일양성학교이다.

이 학교는 서평의 좁은 안방에서 시작했다. 병중에 자신의 침실에서 몇몇 여학생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농촌과 교회 여성 지도자를 기르겠다는 신념이 구체화된 것이다. 학생들은 세례교인으로서 목사나 지역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입학했다. 학생들을 모집할 땐 멀리는 평양까지, 또는 교통이 불편한 고흥지방까지 조랑말을 타고 갔다.

당시 한국교회 내에는 어머니 역할을 해 줄 여교사와 여성 지도자, 그리고 전도부인들이 절실하고 시급했다. 그런 점에서 이일학교나 수피아여학교는 선교부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운영하면서, 한국교회에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데 큰 몫을 했다.

1년에 3개월씩 수업이 진행됐다. 방을 덥히는 데 들어가는 석탄이 톤당 20달러가 소요됐다. 필요한 경비는 여러 선교사들이 도왔다. 학생이 늘자 서평은 '캘커타의 블랙홀'이라 별명을 지어준 오두막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이 집은 학교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동료 선교사가 자기 집 안방을 학교로 사용하도록 해서 그곳을 교육공간으로 사용했다. 한동안 오원기념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1923년 9월 4일, 남장로회 한국선교부는 광주 및 전주에 '여성성경학교'를 열도록 했다. 선교부에서 공식적으로 여교역자 및 교회여성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물론 초급성경학교(Junior Bible School)이다.

1대 교장으로 광주엔 서서평이, 전주엔 최마태(Mattie S.Tate) 여 선교사였다. 이들 학교는 1924년 남장로교 해외선교회로부터 동시에 승인을 받았고, 후에 광주 이일학교와 전주 한예정 성경학교로 발전했다. 1년에 6개월씩 2년 과정으로 진행됐다. 1960년 선교후원비가 줄어듦에 따라 선교부의 결정으로 이일학교가 전주의 한예정 성서신학원과 합병돼 전주로 옮겨 두 학교가 합병하게 됐다. 1994년 한일신학교로 이름이 바뀐 이일학교가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한일장로교 신학대학교로 바뀌었다.

한일장신대학교는 1920년, 이일학교의 출발을 대학의 기원으로 잡고 우리나라에서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로서의 출발시점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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