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조직의 열매로 범세계적 교제가 강화되다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⑪

한국기독공보
2023년 02월 21일(화) 10:39
'여전도회, 하나님의 나팔수' p.74
미국 장로교 부인조력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회장, 윈스보로 여사가 극동지역 순방을 계획했을 때, 그들은 이 방문을 통해 어떤 열매를 수확하게 될지 아무런 예상조차 하지 못 했다. 그들이 선교지에 다가섰을 때, 단지 회장에 대한 명예로운 대우와 수많은 현지 선교사들과의 교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고, 이로써 그들 또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윈스보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여행의 동반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가 주어진 것 외에도, 캐리 캠벨의 극동 방문은 적어도 두드러진 네 단계의 봉사를 진행했다. 이는 전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서 교제를 이끌어 나가는 데 아주 유용했다.

많은 여성 선교사들이 안식년 휴가 중에, 새로운 조직인 부인조력회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 유사한 여성조직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나라, 광주에서 사역하던 엘리제 쉐핑의 리더십 아래 첫 번째 조직이 이뤄졌다.

윈스보로 여사의 한국 방문은 그곳의 부인조력회에 새로운 격려와 조언을 제공했다. 비록 그녀가 중국과 일본을 함께 방문했을 때, 부인조력회와 같은 조직은 없었지만, 그녀의 방문은 미국장로교 선교부가 여러 나라의 여성사역을 격려하는 데 매우 유익했다.

극동 방문의 이야기가 미국의 모 교회에서 회자됐다. 부인조력회 회원들은 생소함을 느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동지애를, 바다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다.

극동 선교지를 여행한 사람들은 우리 여성 선교사들의 활약상에 새삼 인상을 받지만 대부분 그들의 모 교회인 미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진실로 현장에 사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던 미지의 세계 여성들의 이야기로, 그곳에서 매일 전개되는 모험과 신비, 희극과 비극 등이 선교사들에 의해 쓰이기만 한다면 충분히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소재들이다.

이같은 생각을 시도하면서 또 선교 영웅들의 경험을 되뇌이면서 윈스보로 여사는 적어도 10명의 영웅적인 사역자, 이렇게 위대한 크리스찬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했다. 이 계획은 1937년, '영광스런 삶(Glorious Living)'이란 제목으로 출판됐고 시작됐다.

이들이 극동지역을 여행한 후에 의료 선교사들이 일하는 병원, 진료소에 의료용품과 생활용품을 보내는 백십자가(White Cross)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또 선교사 자녀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을 위한 프로젝트도 병행됐다.

방문객들은 네티 그리어(Nettie Grier) 박사와 브래들리(J. W. Bradley)와 같은 의사들이 중국의 병원과 진료소에서 병든 이와 아픈 이를 위해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치료에 필요한 의료소모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붕대 같이 미국에서 흔한 용품이 현지에선 끓여 재사용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고향에 있는 여성들이 전쟁 중 적십자를 통해 이루었던 것처럼, 왜 선교지의 병원들을 위해 똑같이 도울 수 없을까?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백십자가 사역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선교사 부인과 자녀들이 안식년을 맞아 고향으로 휴가 올 때, 입을 수 있도록 이들을 위한 새 옷을 장만하는 일이 시작됐다. 부인조력회는 그들이 선교사들에게 가졌던 관심을 이런 봉사를 통해 구체화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고 있다.

부인조력회는 설립 10주년이 되던 1922년부터 비로소 창립기념 행사를 시작했다. 그들이 극동지역을 방문하면서 그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일본의 코치(Kochi)에 있는 애니 도드(Miss Annie Dowd) 학교를 방문하고서부터 였다.

여기서 방문객들은 어린 소녀들을 위한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45명의 어린 소녀들은 부모에 의해 노예로 팔려나가는, 너무 끔찍해서 생각조차 하기 힘든 경험을 겪고 구조됐다. 이들을 수용하는 건물들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소녀들을 위한 봉사는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한 전도자로 변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역이었다.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은 많이 부족하고 이를 지켜 본 이들은 그 책임감을 통감했다. "우리는 교회의 여성도들에게 이를 알리고, 새로운 건물을 위한 기금을 허락하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 비전은 부인조력회 창립을 기념하는 행사로 국내외의 선교지에서 긴급히 필요한 물품을 보내는 행동으로 옮겨졌는데, 1922년의 첫 번째 모인 물품 일부는 도드학교로 전달됐다.

그래서 태동한 것이 부인조력회의 창립일에 생필품과 의료용품들을 모으고 지적인 관심과 진실된 교제로 무장해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운동이 시작됐다. 이러한 부인조력회의 사업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서서평 선교사가 광주에서 팔려가는 여성들과 소녀들을 구해 이일학교를 열고, 이들에게 복음과 재활의 소망을 가져다 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미국장로교 부인조력회는 1927년 창립 기념 헌금으로 모인 5만 6481달러를 보내 광주 수피아여학교 내에 현대식 홀을 지어주면서 윈스보로 여사의 관심을 표명했다. 이뿐 아니라 1926년엔 800달러를 보내와 서울에 여성 긴급구조센터를 세우도록 지원했다. 복음과 인권의 양 날개가 일본의 코치 시와 한국에 자리잡게 된 이유가 됐다.

이 외에도 부인조력회는 1947년 이일학교를 위해 약 5만 달러를, 1957년에 메디컬 장비를 위해 15만 달러를 보내와 광주기독병원과 전주예수병원을 도왔다. 1960년대엔 전주예수병원을 신축하는 비용으로 41만 달러를 보내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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