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조력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되는가?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의 여전도회 ⑩

한국기독공보
2023년 02월 15일(수) 18:10
지난해 2월 선교여성의 날 예배에서 기도하는 회원들. / 한국기독공보 DB
성경은 죄인을 구속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여성들을 어떻게 붙들어 쓰셨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출애굽 시기 미리암을 통해 모세를 구하는 역사요, 믿음의 여인 한나를 통해 그의 아들 사무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대언자로 쓰임 받는지를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사사 드보라와 왕비 에스더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대하드라마도 있다. 룻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다윗의 가계를 잇는 구원사의 핵심도 보인다.

예수 역시 정결한 여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으로 뵙는 영광을 누렸다. 이 모두가 믿음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욥바의 도르가와 부르스길라와 로이스 할머니 등은 이런 저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입에 오르내린 여성들이다. 주님은 당신의 사역 기간 동안 믿음의 여성들을 통해 그 삶과 봉사에 관한 새로운 도전을 이루어내셨다.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은 단지 어머니요, 부인이며, 뒷골방에 쳐진 아낙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지경을 넓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님의 오른 팔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심어준 미국장로교회의 여성 조직인 부인조력회가 1912년에 창설된 이후 해외에서 처음으로 부인조력회를 이식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들이 멕시코, 그리스, 브라질과 중국, 일본 등 수많은 나라에 먼저 복음을 심었고 북장로회가 1884년에, 남장로회가 1892년에 조선 선교를 위한 첫 발을 내딛은 이후 과연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는 말씀이 이뤄진 사역 현장이 조선이었다.

미국 부인조력회 창립 이후 그들이 어떠한 원리와 운영방식으로 개교회와 부인전도회를 운영했는지 살펴보자. 조선은 비록 시작은 미미했고 환란과 궁핍이 많았지만 시련 뒤에 찾아온 달콤한 맛이 한국교회를 채웠다. 부인조력회 원리는 서서평 선교사와 김필례에 의해 번역되고 1928년부터 1934년까지 현재의 한국 여전도회 조직의 근간이 됐다.

지역 교회와 조력회 영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성경공부반 반드시 운영 △청지기 사명:선교연구를 통해 청지기(Stewardship) 직분을 수행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조력 △절기별 특별 작정기도:임원이 마련한 좋은 프로그램과 '기도의 일정' 대로 해당 기간에 돌아가며 기도.

조력회 운영세칙에 따르면, 조력회는 다음 10개의 조건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조력회 내 한 개 이상의 성경공부반 개설 △회원 15% 이상 십일조 생활 △회원 50% 이상 가정예배 △회원 50% 이상 기도달력을 따라 기도 △국내와 해외 선교를 위한 연구 반 개설 △회원 50% 이상 교회 신문이나 선교 잡지 구독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신앙 교육 진행 △교회 내 모든 여성 조력회 회원으로 등록, 임원단 매년 교체 △조력회 모임 출석률 50% 이상 △전년도 대비 구제 예산 5%씩 증가

이러한 이유로 미국 부인조력회는 해마다 10% 이상의 회원 수를 배가시키고, 이웃과 섬김을 위한 헌금과 헌물의 목표치를 20% 이상 늘려 잡았다. 여기서 말하는 퍼센트란 성경공부반, 기도 모임, 선교 연구, 교회 잡지나 조력회 모임 전반에 대한 참석률을 증가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준이 우수와 비우수 조력회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단순하지만 무지하고 아무 재력조차 없던 여성들로 조직, 유지되던 시기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사실 과중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서서평 선교사는 192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그에게 여전도회 조직의 대임을 맡겼을 때부터 미국 조력회의 조직 원리를 그대로 적용했다.

미국 조력회는 매년 여름 미션스쿨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몬트리트에서 열었고 이곳은 미국 여전도회의 메카로 불렸다. 안식년 중인 선교사들은 몬트리트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고 이곳에 머물며 영적 육적 재충전했다. 몬트리트는 부인조력회 본부가 캔자스시티와 세인트루이스, 애틀란타로 옮겨 다니는 와중에도 모든 선교부와 조력회 회원들이 선교사들과 더불어 쉼을 얻고 이곳에서 자녀들과 여름휴가를 보내며 선교에 대한 도전을 꿈꾸던 장소로 이용됐다.

1942년 8월 14~20일,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에 전체 선교사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선선교 50주년 기념식을 열고 '흑암을 걸었던 사람들(The People that walked in Darkness)'라는 타이틀로 연극도 했다. 이들은 해방 후 1947년부터 한국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는데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6·25 전란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몬트리트(Montreat)

조선을 향한 선교사들의 기도, 부인조력회 회원들이 마음이 모인 곳이다. 한국 개척 선교사 윌리엄 레이놀즈가 1937년에 은퇴하고 몬트리트에 낙향한 이래 한국에서 은퇴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곳 몬트리트에 둥지를 틀었다. 흔히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이라고 알려진 몬트리트는 한국과의 깊은 영적교감을 나눈 마을이 됐다.

그것은 해외선교부가 있는 테네시 주의 내슈빌도 아니고 많은 선교사들이 졸업한 유니언신학교가 있는 리치몬드 버지니아주도 아니었다. 현장 사역자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불러주고 기도의 제단을 쌓았던 부인조력회 회원들이 이들을 격려하고 영육 간에 휴식과 쉼을 나눈 몬트리트가 선교사들에게 편히 누울 자리를 제공한 탓이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선교사들은 몬트리트에서 고향과 같은 안락함과 내 집 같은 온기를 누렸다.

이는 선교사들이 부인조력회의 산실인 몬트리트에서 느낀 것 만큼의 온기와 토양을 교회 내에서 여전도회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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