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작> 큰 형

[ 제20회기독신춘문예 ]

정범석
2023년 01월 18일(수) 10:00
큰형을 한줌 재로 받았다.

흙 탄내가 났다.

아버지 어머니 살 냄새와 닮았다

나는 고아 같이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우리 큰형은 속초 영랑동 바닷가 마을에서 계란 장사를 했다.

가게를 내고 앉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손수레에 계란을 싣고 골목골목을 뒤지며 "계란 사세요" 를 외치며 계란을 팔았다.

큰형의 손수레는 다른 사람의 손수레에 비해 항상 더 무거웠다. 보통 사람이 싣지 않는 지적장애라는 짐을 더 싣고 다녔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의 맏자식인 큰형은 나와 여덟 살 터울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큰형이 지적장애자인 것을 제데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냥 잘 웃고, 화를 낼 줄 모르고, 언제든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큰 형이 좋기만 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큰 형이 보통 이하로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냥 좋던 그 웃음이 푼수 없어 보이고, 내 부탁을 마냥 잘 들어주던 그 선한 마음이 오히려 내 몫의 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춘기의 방향 없는 자존심으로 그런 큰 형의 부족을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워서 함께 밖에 나가는 일을 꺼려했고, 어쩌다 친구들과 같이 길을 가다 큰 형을 만나게 되면 외면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어머니께 따지듯 물은 적이 있다.

"엄마, 큰 형은 왜 저래? 우리 식구 다 괜찮은데…"

"어… 형이 애기일 때 보약을 너무 세게 먹여서 그렇게 됐단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더 물을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원인이 궁금했던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큰 형에 대한 불만을 어머니께 풀어보고자 하는 내 화풀이의 분출이었으니까.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됐다. 부모님의 첫 자식이자 장남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넘치다 못해 화를 부른 것이리라.

어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의 크기만큼 큰 형의 장애는 어머니의 한으로 쌓였고, 7남매의 자식 중에서 큰 형은 어머니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어머니는 만년에 우리 집에 오셔서 3년쯤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1년 전쯤에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두고자 옛 사진들을 꺼내놓고 어머니와 함께 옛 이야기 마당을 펼치곤 했다. 여러 장의 사진을 놓고 웃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큰 형이 나오는 사진 앞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을 글썽이셨다. 우리 7남매의 이름을 짚을 때면, "맨 끝에는 범철이…, 그 위로 범석이…, 또 그위로 범용이…" 여기까지는 잘 대답하시다가 맨 위 큰형에 이르러서는, "버엄 여…얼이…"하고 더듬거리며 어김없이 눈물을 머금으셨다.

어머니도 우시고, 어머니의 아픈 마음이 안쓰러워 나도 함께 울었다. 어머니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 가늘게 달싹이던 입술 말씀이 "버엄 여리", 이 이름이 아니었을까 유추해본다.



큰 형은 형수를 참 잘 만났다.

형수는 몸은 좀 불편했지만 정신이 바르고, 셈이 빨라서 큰 형의 계란 장사를 잘 돕고 살림솜씨도 야무져서 우리 형제들 누구에게도 손 한번 안 벌리고 잘 살았다. 슬하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잘 키워 공무원이 됐다. 하지만 큰 형의 손수레는 더 무거워졌다. 엎친 데 겹치는 격으로, 초기증상이기는 하지만 그만 파킨슨병까지 얻었다. 그런 중에도 큰 형은 계란 장사를 계속했다. 형수와 조카가 아무리 말려도, 형제들이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큰 형에게 계란 장사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놓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같은 것이었지 싶다.

큰 형의 연식(年 食)이 일흔 둘을 헤아리던 봄날, 그 날도 계란 장사를 다녀와서 시장하던 차에, 급하게 드시던 찰떡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넘어가 기도폐쇄 상태에 빠져서 구급차에 실려 갔다. 의식없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로 연명하다가 한 달 만에 삶의 끈을 영 놓으셨다. 너무 아깝고 안타까운 이별이다.

"아들은 다들 부러워하는 공문원이 됐겠다, 이젠 효도 받을 일만 남았는데…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영랑동 앞바다 오리바위 치는 파도소리가 더 섧게 들리는 날이었다.

우리 부모님의 슬하 7남매 중, 첫 죽음이다. 온 가족의 합의로 화장을 선택했다. 두 시간여의 화장시간이 지나 유골함을 받으라는 안내 소리가 들렸다. 2~3초 남짓의 짧은 순간, 내가 받아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내 등을 떠밀었다.

후에 돌이켜 보았는데, 그때 내 등을 떠밀던 그 의무감은 내 사춘기 시절에 큰 형을 부끄러워하고 외면했던 것에 대한 사죄이자, 큰 형으로 인한 어머니의 저린 가슴에 대한 안갚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분골함을 받았다. 형을 받는 다고 선뜻 나섰는데 형이 아닌 형의 분골인 것에 잠깐 머쓱했다. 하지만 아직 따뜻한 흙 탄내가 좋았다. 아버지 어머니 살 냄새가 났다. 느닷없는 부모님 살 냄새가 부모님 가신지 이십여 년이 지난 그때에서야 내가 부모 잃은 고아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형보다 잘난 동생 없다고, 내 딴엔 부족하다고 여겼던 큰 형이 내 잠재의식 속에서는 부모님 같은 존재로 살고 있었던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큰 형, 내 어떤 말도 웃음으로 받아주던 형, '안돼','싫어'라는 말을 할 줄 모르던 형, 그게 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형의 마음 씀이 부모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가신 후, 형은 내 속에 부모님 맞잡이로 살고 있었나 봅니다. 형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내가 많이 부족한 동생이었네요".

손자를 셋 씩이나 둔 내가, 고아 같은 서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큰 형의 주검을 안고서.



정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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