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광주 가는 길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의 여전도회 ②

한국기독공보
2022년 12월 14일(수) 11:21
총회 한국기독교사적 제28호 옛 미국남장로교 광주선교부 부지에 남아 있는 호랑가시나무. 선교부 부지엔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가져온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거목이 되어 자라있고,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7호인 양림동 호랑가시나무가 선교사들에 의해 소중히 보호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한국기독공보 DB
1910년, 신임 선교사 존 텔미지는 목포를 거쳐 광주로 부임했다. 그는 전라남도에서 사역했던 대부분의 고참 선교사들이 했던 것처럼 60마일 여정 가운데 영포(오늘의 영산포)까지는 소리도 요란한 일본제 발동선을 타고 갔다. 보름달이 꾸불꾸불한 영산강과 울퉁불퉁한 언덕의 자연스런 조화를 비추며 조선에의 신비감을 더하는 때였다. 이 길은 지난날 호남 선교의 새날을 열었던 오웬과 배유지 가족이 목포에서 광주로 거처를 옮길 때, 프레스턴과 니스벳이 내왕하던 뱃길이기도 했다.

1909년 봄, 닥터 포사이드는 생사의 갈림길에선 오웬의 갑작스런 병고를 윌슨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뱃길이 끊어진 시각인지라 그는 부랴부랴 그 머나먼 길을 노새를 타고 이 노정을 밟기도 했다. 그가 영산포 노정에서 만난 문둥병 들린 아낙을 살리고자 자신의 바쁜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날, 이 땅에 버려진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노정을 스쳐갔건만 강도 만나 버려진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의 눈과 가슴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목포에서 영산포로 이어지는 육로와 뱃길에는 이처럼 한국 근대사의 영욕에 공을 세웠던 벽안의 선교사들이 눈길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매혹적인 야간 뱃길이 마쳐질 무렵 영포에 닺을 내리고 짐꾼들이 바삐 짐을 옮기던 중, 몽고메리 백화점으로부터 기증받은 포드 자동차를 끌고 나온 벨 목사의 아들 헨리의 영접을 받았다. 보통은 목포와 광주 사이를 가마나 말을 이용할 경우 족히 사나흘은 소비해야 하는 터라 텔미지의 광주 입성은 포사이드의 바빴던 걸음걸이에 비하면 가히 낭만적으로 보인다.

텔미지는 광주가 신도시였음에도 도로는커녕 꾸불꾸불 좁은 골목길이 가득한 조그마한 성벽도시였고 양림동 언덕에서는 기와로 덮인 몇 채의 정부 건물이 내려다 보였다고 기록한다. 광주 도심지로부터 1.6킬로 떨어진 이곳 메마른 언덕을 남장로교가 선교 거점으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이곳 땅을 샀던 때가 1904~1910년 사이였다.

양림동 언덕은 여느 한국 언덕처럼 크고 작은 무덤들이 널부러져 있다. 그 가운데 세 개의 무덤은 돈 많은 양반의 묘지인 양 제법 아름드리 소나무가 병풍처럼 휘어진 듯 한 폭의 그림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효심 많은 자손들은 자신의 신분도 과시하고 집안의 위세도 떨 겸 조상 무덤에 정성을 들이는 것이 효심이라고 여겨왔다.

선교부는 광주를 새로운 선교 거점으로 삼고 1898년에 양림리 86번지 1만66평의 토지를 시작으로 마을의 집 여러 채와 부속 땅들도 사들였다. 그래서 감나무 숲과 밭뙈기들이 선교부 자산으로 편입되었다. 선교부는 순천 선교부를 위해 매산동 일대의 땅과 공동묘지 1만 4천 평을 1910년에 사들였다. 또 광주 선교부가 양림동 임야 50에이커(약 7만 2000평)를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당시 목포부 양동에 거주하던 J.S 니스벳 선교사의 이름으로 구입하게 했다.

광주 천변에서 양림동으로 들어오는 길에 늘어선 아카시아와 잡목들을 정리해서 새로 길목을 냈다. 길목의 양 편에 흡사 도열한 근위병처럼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갖춘 선교동산에 기와를 얹은 벽돌 모양의 서양식 건물 여섯 채가 들어섰다. 세워진지 오래지 않아 불타고 없어진 윌슨 선교사의 사택 옆에는 병자들을 위한 진료소가 차려졌다. 스코틀랜드 나환자 협회에서 광주의 나환자들을 위한 숙소가 세워지기 직전까지 갖가지 병자들과 문둥이들이 뒤엉켜 진료를 받는 모습이 노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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