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요람 속 순교서열

[ 목양칼럼 ]

황인돈 목사
2022년 12월 14일(수) 08:04
겨울 한 복판, 교회 마당에 살짝 뿌려진 눈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데 인기척이 났다. 옅은 발자국 소리가 다가와 멈추더니 나지막한 소리가 들린다. 은퇴 권사님이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는 내 소매를 잡고 목양실로 인도했다. 주저하는 듯 품속에서 소책자를 꺼내는 데 지난 주일에 배부한 교회요람이다. 책을 펼쳐 자신의 사진과 이름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사진은 본인 것이 맞고 이름도 직분도 오타는 없다. "무슨 문제라도…?"

그는 자신의 사진과 이름이 왜 그곳에 있는지 물었다. 작년까지 은퇴 권사의 사진은 시무 권사 앞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올해는 시무 권사 다음으로 옮겨졌다. 사진의 위치가 뒤로 옮겨진 것 때문에 자녀들까지 화를 내며 당장 교회에 가서 따지라고 한 모양이다. 교회로 달려오긴 했지만 목사 앞에서 막상 말을 꺼내려니 조심스러웠는지 화난 표정은 최대한 숨기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척 애쓰는 모습이 겉으로 숨겨진 얼굴 뒤로 보였다.

은퇴라는 용어를 이해 못할 분은 아니지만 은퇴자의 자리매김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듯 한 번 권사는 영원한 권사라는 논리에 오히려 설득당할 뻔 했다. 평생토록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온 그 분의 수고를 생각하면 담임목사보다 더 앞쪽에 사진을 넣어드리고 싶었다. 평소 부드러운 성품과 인자한 말씨로 교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어르신인데 교회요람 속 서열 문제 하나로 찬바람을 무릅쓰고 찾아왔던 오래 전의 일이 기억 난다.

청년 교인 하나가 불쑥 목양실로 찾아와 교회요람을 내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교회가 군대도 아닌데 왜 서열이 있습니까?" 그의 질문은 직분자들의 서열이 공동의회 투표의 득표 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서열의식, 계급의식을 따지는 것이었다. 무엇이라 대답하기 난감하여 망설이는 데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는 지혜가 있었다.

"이것은요…" 계속 말했다. "만약 지금이 6.25라고 생각해봅시다.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만약 이 책을 본다면 누구부터 잡아내겠어요? 가장 앞에 있는 담임목사겠지요? 그 다음은 부목사, 장로 … 네, 맞아요. 그건 순교하는 서열이에요." 우문현답이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엉뚱한 대답이었는지 모르지만 청년은 두 말 없이 돌아갔다.

직분은 명예보다 사명과 책임이다. 직분의 서열이 갖는 의미는 더 많은 책임을 맡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야 할 책임, 혹 교회에 어려움이 닥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난다 해도 끝까지 남아 교회를 지키고 세워가야 할 책임을 의미한다. 성경에 예고된 바와 같이 언젠가 극심한 환란과 박해의 상황이 온다면 직분은 곧 순교서열이 될 것이다.

어느 시골 교회의 임직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날 새로 임직 받는 장로님은 교회와 성도들 앞에 서서 이렇게 고백했다. "오늘 저는 죽었습니다."



황인돈 목사 / 아름다운충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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