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성도들의 헌신으로 일군 광주 기독교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의 여전도회 ①

한국기독공보
2022년 12월 07일(수) 10:38
광주시립사직도서관 앞에 있는 선교기념비. 미국남장로교가 파송한 유진벨(배유지)선교사는 나주와 목포를 거쳐 광주에 복음을 전했다. 1904년 유진벨 선교사가 오웬 선교사 등과 광주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광주 선교의 첫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전남노회가 세운 기념비다. / 한국기독공보 DB
지역의 여전도회 역사를 살펴보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여전도회 지연합회가 발간한 도서를 바탕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여전도회가 자리잡고 발전한 역사를 소개한다. 우선 전남지역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연재한 뒤, 추후 부산과 경남지역 여전도회사를 다룰 계획이다. <편집자 주>

일반적으로 광주 기독교는 1904년 12월, 크리스마스가 임박해 목포에서 광주로 옮겨온 오웬과 유진 벨 선교사 가정으로부터 광주 기독교의 시발점을 삼는다. 그러나 목포에서 사역했던 스트레퍼(Straeffer) 양이 1902년 7월호 크리스천 옵서버에 기고한 글에는 당시 목포 선교부를 맡고 있던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 외곽지점인 나주와 광주거점에 선교 베이스를 마련하기 위해 해당 지역 사람들과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두 곳에 거주하는 선교사 가정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광주에 이미 적당한 예배처소를 마련했고 나주와 광주 모두 예배를 위해 정기적 모임을 갖고 있음을 보고한다.

1901년 부인 위더스푼이 죽고 난 이후 상심에 젖은 유진 벨이 자녀들과 더불어 장기간에 걸쳐 미국에 머무르고 있을 때 오웬 부부 역시 미국에서 달콤한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나의 언어 선생과 벨 씨의 전 조력자가 교대로 두 주일에 걸쳐 광주 예배처소에서 성공적인 예배 모임을 가졌고 목포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성경 권서인이 나머지 장소에서 작은 여인숙 앞마당에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한다. 비록 어떤 외국 여성도 이 도시를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 도시 방문이 별 탈 없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한 번도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달콤한 말씀을 이야기하고 주님께서 당신을 그의 잃어버린 어린 양을 이끄시는데 쓰임 받음을 느끼게 된다."

스트레퍼 양의 광주 선교보고는 실제 선교사들이 어떤 전략적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믿음으로 결신된 목포 성도들에 의해 광주 선교가 하나님의 진행형으로 무르익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코잇트 선교사가 1929년에 전남노회를 회상하며 쓴 글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낚시하기에 알맞은 작은 포구밖에 없던 목포가 극히 소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도부터는 안식년에서 돌아온 오웬의 리더십 아래 본격적인 광주 거점 전략이 작동한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오웬 선교사에게 훈련 받은 목포의 성도들이 광주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목포 성도들은 광주 거점을 위해 매주 전도와 예배를 실시했고 1903년에는 일단의 성도들이 광주로 주거를 옮겨 교회가 정착된 이후 다시 목포로 돌아갔다.

1913년 순천 선교부가 개설될 때에 이들은 다시 순천으로 옮겨 살며 새로운 선교거점을 확장해 나갔다. 그런 점에서 헌신된 목포 성도들이야말로 전라남도 선교 역사의 지평을 열었던 개척자들이었다.

유진 벨 목사 역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비록 우리는 일손들이 태부족이지만, 우리는 축복으로 가득찬 한 해를 보냈고 알찬 진척을 이루었다. 이것은 대부분 헌신되고 열정적인 현지 교인들의 쉼 없는 노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들의 노고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같은 결실이 가능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유진 벨이 광주 지역을 총괄하고 있었는데 이때 김윤수가 지역 지도자로 세워졌다. 그는 효율적이고 가치 있는 도움을 주었던 바 항상 필요한 자리에 있었고, 총명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에 최선을 다했다. "선교사들이 자리를 비웠을 경우에 대신 자리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장으로, 또 지역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수요 기도회에서 자신의 순서가 왔을 때 기도회를 인도하기도 했다"고 기록한다.

군산과 전주 선교부를 열었던 전킨 선교사는 김윤수를 높이 평가하여 말하기를 "목포에서의 선교 사역이 오직 한사람의 회심자밖에 없었음에도 가치가 있는 사역이었던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김윤수라는 회심자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극찬했다.

1903년 선교사들보다 한 해 전 광주로 이주해 온 김윤수의 삶은 가히 초인적인 헌신으로 확장 주일학교와 교회 개척에 그 삶을 바쳤다. 주님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던 김윤수의 회심은 목포와 광주 선교에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헌신된 믿음의 사람들로 시작된 광주선교는 1908년, 광주교회의 성도 수가 125명 정도였고, 18명이 학습을, 4명이 세례를 받았다. 정규 출석 교인 외에도 다수의 가족들이 복음을 흔쾌히 받아들여 비정기적으로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 교회는 수적 규모도 작고, 자원도 부족하나 어느 다른 한국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으며, 선교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교회에서 무보수로 설교를 하고, 주일학교와 예배인도를 가까운 부락에서 행하는 멤버들 외에도 교인들은 봄에 전임전도사를 세워 신자가 없는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는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주시립사직도서관 앞에 있는 선교기념비에 대한 설명. 미국남장로교가 파송한 유진벨(배유지)선교사는 나주와 목포를 거쳐 광주에 복음을 전했다. 1904년 유진벨 선교사가 오웬 선교사 등과 광주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광주 선교의 첫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전남노회가 세운 기념비다. / 한국기독공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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